| 한글 | 함명(대현) |
|---|---|
| 한자 | 涵溟(台現)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호의, 초의, 백련, 완호, 침명 한성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824년 |
| 호 | 함명(函溟), 태선(太先) |
| 주요주석처 | 선암사 |
| 비소재지 | 순천 선암사 함명대선사비(1914) |
조선 후기 장성 백양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수행승이자 설두와 함께 양대 고승으로 일컬어진 학승
조선 후기의 고승인 함명(涵溟) 대현(台現, 太先)은 1824년(순조 24) 9월 9일 화순읍의 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복(同福) 오씨(吳氏)로, 범승(梵僧)을 만나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전한다. 어린 시절부터 비린 음식을 멀리하고 불가(佛家)에 출가하려는 뜻을 두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풍곡 덕인(豊谷德仁)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출가 후 함명은 체계적인 수행의 길을 걸었다. 도암(道菴) 선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었고, 당대 고승인 침명 한성(枕溟翰醒, 1801~1876) 강백에게 삼장을 공부하고, 선 수행의 가르침인 선참(禪懺)을 받았다. 이후 풍곡 덕인 선사의 문하에서 법통을 잇는 전통 의식을 치르고 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천부적인 총명함과 해박한 경전 이해력을 지녔던 그는 수행과 공부에 있어 한시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언행이 진실하고 겸손했다. 특히 화려한 말이나 거짓된 표현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849년(헌종 19) 서석암(瑞石庵)을 짓고 풍곡 덕인의 임제종관(臨濟宗觀)을 강의하였는데, 특히 화엄의 종주로 이름을 떨쳤다. 함명의 제자 교육 방식은 매우 특별했다. 새로운 제자를 맞이할 때도 오랜 친구를 대하듯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때면 항상 향등(香燈)을 보여 주는 독특한 전통을 지켰다. 강의 규칙은 엄격하면서도 명확했고, 재(齋)를 올리는 법도 또한 엄숙하면서도 차분했다. 이러한 그의 교육 방식은 30여 년간 이어졌고, 그의 명성이 전국에 퍼져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가르침은 백암(栢庵)과 무용(無用) 스님의 유풍(遺風)이면서, 설암(雪岩)과 상월(霜月) 스님의 여향(餘香)을 잇는 것이라 여겨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불교계에서의 그의 위상이다. 이전에는 좌 형암(荊庵), 우 양악(羊岳)이라 하였고, 그다음 세대는 좌 침명(枕溟)과 우 백파(白坡)라 하였다. 이제 당시에 이르자 함명과 설두(雪竇)가 좌우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졌다. 이는 중국 선종의 남종 혜능(慧能)과 북종 신수(神秀)의 전통에 비견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가 확립한 교육 전통과 수행 체계는 불교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백파(白坡)· 침명(枕溟)·응화(應化)·우담(優曇) 등이 입적한 후 함명과 설두·경담(鏡潭)·연주(蓮舟)·퇴은(退隱)·휴암(休庵) 등이 조선 후기 불교계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일찍이 일행(一行) 선사는 이러한 예언을 했다. “계곡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내 도를 전해줄 사람이 올 것이다.” 후에 도선(道詵) 스님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모두 전수받고 떠나게 되었다. 이때 일행 선사는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했다. 이처럼 법맥의 올바른 전수는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함명의 법맥은 한국불교의 중요한 전통을 잇고 있다. 청허 휴정(淸虛休靜)에서 시작하여 편양 언기(鞭羊彥機), 풍담 의심(楓潭義諶), 월저 도안(月渚道安), 설암 추붕(雪岩秋鵬), 상월 새봉(霜月璽篈), 용담 조관(龍潭慥冠), 규암 낭성(圭岩朗城), 서월 거감(瑞月巨鑑), 회운 진환(會雲振桓), 원담 내원(圓潭乃圓), 풍곡 덕인(豊谷德仁), 함명 태선(涵溟太先) 순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그의 제자 경붕 익운(景鵬益運)을 통해 경운 원기(擎雲元奇)에게로 전해졌다.
화엄학에 밝았다고 하며 저술로는 『치문사기(緇門私記)』 1권이 있다.
· 집필자 : 불교백과1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