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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터

한글성주사터
한자聖住寺址
유형사찰
키워드오합사, 법왕, 무염, 성주산문, 대낭혜화상탑비
주소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관련인물무염(無染), 최치원(崔致遠), 최언위(崔彦撝)
신라 하대 무염이 창건한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
성주사는 599년(법왕 1)에 백제 법왕이 오합사(烏合寺)로 창건하였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845년(문성왕 7)에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무염(無染, 800~888)이 중창하고, 국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무염은 태종무열왕의 8세손으로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하였다.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에게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성주사에서 40여 년 동안 교화를 펼치며 이곳을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중심 사찰로 발전시켰다. 이 무렵 절은 2천 명의 수행자가 머물 정도의 대찰로 성장하였다. 고려시대 1293년(충렬왕 19)에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무염의 글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祖道]를 처음으로 구별, 설명하였다. 절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지금까지 절터로 남아 있다. 절터에는 여러 건물터와 무염의 대낭혜화상탑비, 4기의 석탑과 석등, 석불입상, 당간지주, 계단 등이 남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건물터로 중문‧금당‧삼천불전‧강당 등이 있고,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에는 좌우에 사자상이 있었는데, 1986년 도난당하였다. 대낭혜화상탑비는 비신과 귀부의 전체 높이가 4.55m에 달하는 신라 최대 규모이다. 890년(진성여왕 4)에 최치원(崔致遠, 857~?)이 글을 짓고,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썼다. 귀부와 이수(螭首), 운룡문(雲龍文) 등의 아름다운 조각과 비문, 글씨 등이 신라의 석비를 대표하여 일찍부터 국보로 지정되었다. 4기의 석탑은 중앙 3층 석탑, 동·서 3층 석탑, 그리고 5층 석탑 등이다. 모두 신라하대 9세기의 양식을 지녀 무염의 중창 당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 집필자 : 한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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