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분황사 |
|---|---|
| 한자 | 芬皇寺 |
| 유형 | 사찰 |
| 키워드 | 원효, 모전석탑, 선덕여왕 |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
| 종단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 |
| 관련인물 | 자장(慈藏), 원효(元曉), 솔거(率居), 설총(薛聰) |
선덕여왕이 창건하고 자장과 원효가 수행하였던 사찰
분황사는 신라시대 634년(선덕여왕 3)에 선덕여왕이 창건하였다.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 나는 황제 절’이란 뜻이다. 신라에는 예로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일곱 곳의 가람터[七處伽藍]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가람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을 남쪽 중앙에 두고, 그 북쪽에 남향으로 세 곳의 금당을 ‘품(品)’ 자 형으로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구조였다. 법당 안에는 신라의 뛰어난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관세음보살도를 봉안하였다. 신라의 왕들은 고승들을 초빙하여 궁궐과 가까운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643년(선덕왕 12)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이 이곳에 머물렀고, 원효(元曉, 617~686)는 여기서 『화엄경소』‧『금광명경소』 등을 집필하였다.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 655~?)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셨는데, 그가 참배하려고 하자 돌아앉았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청동 약사여래상을 봉안하였다. 원성왕(785∼798) 때 분황사 우물에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이 이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져가려고 하였다. 고려시대 1101년(숙종) 국왕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1170~1197) 때 이곳에 화쟁국사비를 건립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피해를 크게 입은 후 중건 과정에서 사역(寺域)이 많이 축소되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 등의 전각을 중건하였고, 청동 약사여래상을 다시 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도 보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1965년에는 절의 우물에서 여러 불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가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많은 유물을 수습하였다.
가람은 보광전과 삼문, 요사, 모전석탑, 당간지주, 화쟁국사비 기단, 석조 유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쌓았다. 현재는 3층으로 높이 9.3m인데, 원래는 7층 이상이었다. 당간지주는 조각과 양식이 정연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지주의 세 곳에 구멍을 두어 현수막을 고정하도록 하였다. 지주를 지탱하는 거북이 모습의 간대석(竿臺石)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례이다.
· 집필자 : 한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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