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종조논쟁

한글종조논쟁
한자宗祖論諍
유형역사
키워드도의국사, 보조지눌, 태고보우,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태고종
시대근대
근현대에 한국불교의 종단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종조와 관련한 논쟁
조선 전기에 국가 공인의 종파가 폐지된 이후 조선 후기부터 불교계에서는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법통(法統)을 계승하는 임제종(臨濟宗)을 표방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종파 창립의 과정에서 한국불교 종단의 조사(祖師)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이 1950년대 이후에 승려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불교조계종과 승려 결혼을 허용하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이념적 대결로 비화하였다.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불교 종파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공인하여 관리하였으며, 조선 초까지 11개 종파가 있었다. 이후 태종 대에 7개 종파로 축소되고, 세종 대에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되었다. 그후 명종 대에 국가 공인의 종파가 폐지되었으나, 불교계는 임진왜란 이후 고려 말 태고 보우의 법통을 계승하는 임제종의 단일 종단을 표방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1908년에 불교계는 ‘원종(圓宗)’을 창립하였으나, 1910년에 종정(宗正) 이회광(李晦光)이 비밀리에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맹약을 맺은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승려들이 ‘임제종’을 창립하였다. 그런데 일제 총독부는 원종과 임제종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며, 1911년에 사찰령을 제정하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종명을 정하였다. 이후 불교계는 1940년대에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태고사를 건립하여 총본산(總本山)으로 정하고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명하였다. 이러한 종단 설립 과정에서 신라 말 도의(道義), 고려 중기 보조 지눌(普照智訥), 고려 말 태고 보우를 종조로 삼아야 한다는 논쟁이 벌어졌다. 1920년대에 김영수(金映遂, 1884~1967)는 조선불교의 연원은 조계종이며, 태고 보우를 종조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30년대에 방한암(方漢岩, 1876~1951)은 남종선을 전래한 도의 종조론을 제기하였으며, 1940년대에 이재열(李在烈)과 이종익(李鍾益)은 보조 종조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재열은 도의는 조계종이 성립되기 4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며, 태고는 조계종이 성립되고 2백 년이 지나서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에 종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해방 후 1945년 9월 22일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일제의 사찰령을 폐기하고 교단의 명칭을 ‘조선불교’라 하고 새롭게 교헌(敎憲)을 공포하였는데, 이때는 종조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5월 20일부터 1955년 12월 8일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라고 유시하면서 결혼한 승려와 결혼하지 않은 승려 간에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때 선학원(禪學院)을 중심으로 승려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측에서는 보조 종조설을 주장하였고, 결혼을 허용하는 승려 측에서는 태고 종조설을 주장하면서 이념적 대립으로 비화하였다. 1962년에 양측이 합의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을 창립하였으나, 1970년에 승려 결혼을 허용하는 측에서는 ‘한국불교태고종’을 창립하여 태고 종조를 주장하였다.
· 집필자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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