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정업원

한글정업원
한자淨業院
유형역사
키워드인수궁, 정업원구기
시대고려~조선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도성 내에 있었던 왕실의 비구니 사찰
고려 의종 대부터 명칭이 확인되며, 왕실의 비빈이나 양반 가문 출신 여성들 가운데 출가자들이 머물렀던 비구니 사찰이다. 그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164년(의종 18)에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볼 때, 고려 초부터 도성 내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화도 천도 이후인 1251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삼아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를 살게 하였다. 충숙왕(1294~1339) 때에는 황주목사 이집(李緝)의 부인 반씨(潘氏)가 남편을 살해하자, 그녀의 머리를 깎여서 정업원에 머물게 하였다.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에 도읍을 세우고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건립하였다. 1408년(태종 8) 주지로 있던 공민왕의 후비가 사망하자, 소도군(昭悼君)의 처 심씨(沈氏)를 정업원의 주지로 삼았다.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대부분 양반 가문 출신이었고, 주지는 왕족이었다. 그런데 태종 대부터 대신들의 정업원 혁파 요구가 잇달았다. 그럼에도 태종과 세종은 대신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는데, 자주 음사(淫事)가 보고되자 1448년(세종 30)에 철폐하였다. 그 후 왕실 비빈의 요청에 따라 1457년(세조 3) 정업원을 복원하였다. 정업원에 대한 국왕의 비호는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유생의 건의를 받아 다시 철폐하였다. 중종은 정업원을 다시 세우고자 했지만,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업원은 1550년(명종 5) 3월에 이르러 복원되었는데, 후궁들의 별처라는 구실을 붙여 인수궁(仁壽宮)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정업원으로 고쳤다. 하지만 유생들의 폐원 요구가 지속되어 마침내 1612년(선조 40)에 폐원되었다. 정업원은 동망봉 아래에 1771년(영조 47)에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가 남아있어서 그곳에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록을 통해 응봉(鷹峰) 아래 창경궁(昌慶宮)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 집필자 : 이종수

관련자료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