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정약용 |
|---|---|
| 한자 | 丁若鏞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대둔사지, 만덕사지, 아암 혜장, 대동선교고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62년 |
| 입적 | 1836년 |
| 호 | 다산(茶山) 등 |
| 시호 | 문도(文度) |
아암 혜장 등과 교류하며 『대동선교고』, 『만덕사지』 등을 편찬한 조선 후기 실학자
18~19세기에 활동한 실학자이다.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1) 등 특히 대둔사(大芚寺: 현 대흥사)와 만덕사(萬德寺: 현 백련사) 승려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 『대둔사지(大芚寺志)』, 『만덕사지(萬德寺志)』를 편찬하였다.
나주(羅州) 정(丁)씨, 자(字)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등이다. ‘다산’은 정약용이 유배 당시 머물던 만덕산(萬德山)에 야생 차밭이 많아 ‘다산’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海南) 윤(尹)씨이다. 16세에 근기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성호 이익(星湖李瀷, 1681~1763)의 학문을 접한 뒤 그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발전시켰다. 1738년(영조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래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며 각종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하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특히 수원 화성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학 외에도 천주교와 같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183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스스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저술은 경집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정약용이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01년(순조 1)에 신유교난(辛酉敎難: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유배를 가면서부터이다. 그는 특히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제자이자 만덕산 만덕사 승려인 아암 혜장과 깊이 교류하였다. 혜장은 당대 최고의 강학장인 대둔사에서 강의를 하였던 승려이자, 당시 만덕사 주지였다. 승려지만 주역(周易)을 비롯한 유학 경전에도 조예가 깊었다. 1805년(순조 5)에 처음 만난 이래로 두 사람은 불교와 유학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정약용은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물며 그와 친분을 이어 갔으며, 혜장이 1811년(순조 11) 젊은 나이에 입적하자 비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청파 혜원(靑坡慧遠), 연담 유일, 설파 상언(雪坡尙彦), 해일(海鎰), 아암 혜장, 수룡 색성(袖龍賾性), 기어 자홍(騎魚慈弘), 망해 하일(望海賀鎰),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등 18~19세기 전라남도 불교계를 주도한 승려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초의 의순은 근대 차(茶)의 중흥주라고 불리는데, 정약용은 그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만덕산 기슭에 위치한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에서 풀려날 때(1818)까지 10여 년간 머물렀다. 강진에 약 18년간 머무르면서 실학서뿐 아니라 『대동선교고』와 같은 불교 관련 서적도 다수 편찬하였다.
정약용은 유학자이나 승려들과의 교유를 바탕으로 『대동선교고』, 『대둔사지』, 『만덕사지』 등 불교 서적도 편찬하였다. 『대동선교고』는 삼국시대 불교 전래부터 신라 말까지의 불교사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1811~1818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둔사와 백련사 사적인 『대둔사지』와 『만덕사지』는 혜장 및 그 제자들, 즉 대둔사 및 만덕사 승려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세 저술 모두 관련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하고 문헌상의 오류를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집필자 : 불교백과1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