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풍담 의심 |
|---|---|
| 한자 | 楓潭義諶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대둔사, 대흥사, 편양 언기, 정양사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592년 |
| 입적 | 1665년 |
| 호 | 풍담(楓潭) |
| 주요 주석처 | 정양사(正陽寺), 대흥사(大興寺) |
| 비 소재지 | 대흥사(大興寺), 보현사(普賢寺), 표훈사(表訓寺) 등 |
조선 후기 대흥사 제1대 종사이자 편양 언기의 법맥을 이은 승려
17세기에 활동한 승려로, 묘향산(妙香山) 성순(性淳) 대사에게 출가하고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편양파(鞭羊派) 승려이다.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 현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1대 대종사이다.
법사(法師)의 법명은 의심(義諶), 법호(法號)는 풍담(楓潭)이며, 속성은 유(柳)씨이다. 1592년(선조 25)에 통진(通津: 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鄭)씨이며, 여의주를 품는 꿈을 꾸고 나서 법사를 낳았다고 한다.
16세에 묘향산 성순 대사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천관산(天冠山)에 머물고 있던 원철(圓澈) 대사를 찾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서장(書狀)』·『도서(都序)』·『절요(節要)』·『선요(禪要)』, 즉 사집(四集)을 배웠다.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와 편양 언기의 문하에서 선을 닦고 그의 법맥을 이었다. 남쪽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러 선사(禪師)를 만나 선을 궁구하였다. 그러던 중에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서 대회(大會)를 열었는데 대중들이 250명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에 나중에 대둔사에서 법사를 기리고자 탑비와 부도를 세우고 대둔사 13대종사 중 제1대 대종사로 추대하였다.
남쪽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한 후에 금강산(金剛山)으로 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언기가 병이 나자 묘향산으로 돌아가 병시중을 들었다. 당시 언기는 『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 등을 주석한 여러 소(疏)를 정리하고 있었다. 법사는 금강산과 보개산(寶蓋山)에 주석하면서 언기의 뜻을 이어 『화엄경』 등의 음(音)과 해석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았다.
1665년(현종 6)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세속 나이 75세, 법랍(法臘) 58년으로 입적하였다. 임종이 다다라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게(偈)를 읊었다고 한다. “기괴하도다, 이 영물(靈物)이여!/ 임종에 더욱 상쾌하다니// 나고 죽음에 변한 모습 없으니/ 가을 하늘에 달만 밝게 비추네.” 입적한 지 9일이 되어도 안색은 평소와 같았다. 제자들이 그에게서 사리(舍利) 5과(顆)를 얻어 부도를 건립하고 탑비(塔碑)를 세웠다.
법사의 비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두륜산 대둔사, 보개산(寶蓋山) 심원사(深源寺), 통진 문수사(文殊寺) 등 총 다섯 곳에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에 있는 「회양 표훈사 풍담당 의심대선사 비문(淮陽表訓寺楓潭堂義諶大禪師碑文)」(1668)은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 보현사에 있는 「보현사 풍담대사비(普賢寺楓潭大師碑)」(1681)는 조종저(趙宗著, 1631~1690)가, 해남 대흥사 부도전에 있는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海南大興寺楓潭堂義諶大師碑)」(1692)는 기오당(寄傲堂) 김우형(金宇亨, 1616~1694)이 찬술하였다.
법사는 조선 중기 불교를 중흥시킨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문하의 4대 문파 중 하나인 편양파의 대표적인 승려이다. 그 또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자들은 정원(淨源)·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설제(雪霽)·서운(瑞雲)·찬영(贊映)·원휘(圓輝)·풍열(豊悅)·삼인(三印)·운밀(雲密)·풍계 명찰(楓溪明察, 1640~1708)·자징(自澄)·도정(道正)·법징(法澄)·장륙(藏六)이다. 이들은 법사의 문하에서 각기 파를 이루어 14파로 나뉘었다. 그중 가장 성한 문파는 월저 도안 계통이다.
· 집필자 : 불교백과1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