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화랑

한글화랑
한자花郞
유형역사
키워드화랑도, 낭도, 국선, 풍월주, 풍류도, 김유신
시대신라~통일신라
신라시대 청소년 집단인 화랑도의 지도자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으로, 화랑도(花郞徒: 화랑과 낭도)의 지도자를 일컫는다. 화랑국선(花郞國仙)·국선(國仙)·풍월주(風月主) 등으로도 불렀다. 화랑도는 15~18세의 화랑을 중심으로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청소년 집단이다. 화랑 한 명당 7~800명 내지 1,000여 명의 낭도(郎徒)로 구성되었다. 진흥왕(眞興王) 시기(540~576)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설치한 원화(源花) 제도가 전신이며, 진평왕(眞平王) 대(579~632) 원광 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 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를 계율로 삼았다. 한 시대에 여러 화랑 집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으며, 이들 화랑 집단을 통솔하던 중심 인물 혹은 중심 기관을 화주(花主)라고 하였다. 화랑으로 선출되는 기준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唐) 고음(顧愔)이 768년(혜공왕 4)에 신라를 방문한 뒤 쓴 『신라기(新羅記)』에 의하면, “귀인(貴人)의 자제 중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겼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용모가 아름다운 남성을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받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신라(新羅) 진골 귀족의 자제 중 용모와 학식, 성품 등이 뛰어난 자를 추대하여 화랑으로 선출한 것으로 보인다. 초대 화랑은 설원랑(薛原郎)이었으며,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총 2백여 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660년(태종무열왕 7) 황산벌 전투에서 활약한 관창(官昌, 645~660)과 통일신라 건국에 일조한 김유신(金庾信, 595~673)도 화랑이었다. 김유신이 화랑이 되었을 때 그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는 점, 화랑을 국선이라고도 했다는 점, 화랑 죽지랑(竹旨郞)의 탄생 설화에 미륵이 등장한다는 점 등에서 화랑을 미륵신앙(彌勒信仰)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용화’란 미륵불을, 향도는 예불분향(禮佛焚香)을 하는 무리를 의미한다. 즉, 화랑을 도솔천(都率天)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화랑은 화랑도의 지도자이자 때로는 미륵의 화신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화랑의 아름다운 이름과 행적을 기록하여 전하는 사료로 「설원랑비(薛原郞碑)」 등이 있으며,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8구체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한다.
· 집필자 : 불교백과1팀

용례

  •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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