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향도 |
|---|---|
| 한자 | 香徒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용화향도, 의읍, 법사, 향약, 두레 |
| 시대 | 신라~조선 |
불교의 포교와 신앙 활동을 위해 조직한 공동체
‘향(香)’을 사용하는 신앙공동체라는 의미로, 불교 포교와 신앙 활동을 위해 조직한 신도들의 공동체, 혹은 결사(結社)이다. 일반적인 신앙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등장하여 대개 불사(佛事) 참여‧지원‧수행 위주의 활동을 하였으며, 고려 말부터는 신앙공동체에서 벗어나 향촌공동체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불교신앙을 기반으로 하지만 산신(山神)신앙과 같은 민간신앙 요소도 혼재되어 있었다.
향도는 한국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명칭으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신앙공동체를 의읍(義邑)·법사(法社) 등으로 불렀다. 사료상 향도라는 단어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7세기 무렵 신라(新羅) 때이다. 김유신(金庾信)이 609년(진평왕 31)에 화랑이 될 때, 그들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부른 것이 첫 사례이다. 승려의 지도를 받아 사찰의 불사에 향도를 결성하여 공덕(功德)을 닦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불상(佛象)이나 탑을 조성하는 등 불사를 위한 재원을 공동으로 마련하거나 사찰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지원하고, 장기적으로 함께 염불(念佛)을 수행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수십에서 수백 명, 많을 때는 1천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결성하였다. 향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수행을 하여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이었다. 촌 또는 군현 단위로 조직한 향도는 지역 내 공동체적인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신라하대에 처음 등장한 이후, 그 역할과 성격은 고려(高麗) 전기까지도 이어졌다. 고려의 향도는 지방의 정치적 공동체인 읍사(邑司)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읍사의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향도를 결성하거나, 읍사와 협력하여 불사를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1011년(현종 2) 예천(禮泉) 개심사(開心寺) 오층석탑 건립에 참여한 미륵향도(彌勒香徒)와 추향도(椎香徒)가 있다. 각각 예천군과 그 속현인 다인현(多仁縣)의 향도로, 구성원이 1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향도였다.
고려 후기인 12세기 이후, 사회 변동 속에서 향도의 구성과 성격도 변화하였다. 중앙 권력자들로 이루어진 향도부터 여성 향도, 일반 백성들로만 이루어진 향도 등 구성 계층이 다양해졌으며, 불교신앙적인 면모는 약해지고 향촌공동체적인 기능이 강화된 사례도 등장하였다. 구성원의 계층 범위가 확대되면서 규모가 점차 작아졌다. 이에 따라 고려 전기까지는 대규모 불사에 치중되어 있던 활동도 후기가 되면 재회(齋會)·매향(埋香)·염불·불화(佛畫) 조성 등 소규모 불사나 상부상조하는 ‘계(契)’의 성격을 띠는 활동으로 바뀌었다.
조선(朝鮮) 초기에 들어서면 향촌공동체적인 성격이 더욱 부각되며, 활동도 불사보다는 상장례 시 상호 부조, 회음의식(會飮儀式) 등이 주를 이루게 된다. 조선 초기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16세기 지방 사족(士族)들의 향약(鄕約), 17세기 후반 이앙법의 보급으로 조직된 두레가 그 기능을 나누어 가지면서 상장례의 일 정도만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축소되었다. 조선 후기에 촌락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조직은 두레였으며, 향도는 일부 지역에서만 ‘황두’ 등의 명칭으로 잔존하다가 사라졌다.
· 집필자 : 불교백과1팀
용례
-
공(公)은 15세(609년; 진평왕 31년)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註 059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며, 〔그의 낭도(郎徒)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더보기 +
관련자료
더보기 +
더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