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홍경장육 |
|---|---|
| 한자 | 弘經藏六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정화불사, 범패, 봉암사 결사, 여석회, 금강경오가해 |
| 시대 | 근현대(일제강점기, 대한민국) |
| 출생 | 1899년 |
| 입적 | 1971년 |
| 이칭 | 김훈경(金勳經), 성전(聖典), 맥문관주인(麥門館主人) |
| 주요주석처 | 부산 청량사 |
| 탑소재지 | 양산 통도사 |
| 비소재지 | 양산 통도사 |
교학 참선 겸비하고 한국불교 정체성 수호한 승려
교학과 참선 수행을 겸한 대표적 선승으로 정화 불사와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헌신했다. 또한 당대의 명필로 서예와 불교 의례에 능통하였으며, 소박하고 청정한 삶을 실천했다.
1899년 7월 9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경주이고, 속명은 김훈경(金勳經)이다. 법명 장육(藏六)은 육바라밀을 상징하며, 처음 법명은 성전(聖典)이었다. ‘맥문관주인(麥門館主人)’이라는 낙관도 자주 사용했다.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 한학을 공부하고 24세에 건봉사에서 철우 대후(鐵牛大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7세에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30세에 건봉사 대교과를 졸업하고 좌주(座主, 강주)로 학인을 지도했다. 특히 『화엄경』과 『금강경오가해』에 깊은 식견을 보였다. ‘화엄좌주(華嚴座主)’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 회상에서 참선 수행을 하며 수좌의 길을 걸었다. 교학과 참선 수행뿐 아니라 범패, 어산, 서예에도 능통했다. 1947년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으며, 1955년 초대 경남종무원장을 지내고 부산 청량사의 사격(寺格)을 일신했다. 1958년부터 2년간 통도사에서 학인들에게 염불을 지도했다. 운허, 홍영암, 고암, 벽안, 구산, 석주, 자운, 석암, 청우, 대휘, 지월, 서옹, 월하, 청담 스님 등 원로들과 함께 여석회(餘石會) 활동을 했다.
1971년 8월 16일 부산 청량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3세, 법랍 50년. 다비는 부산 선암사에서 엄수했다. 노년에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즉시 화장한 후에, 유골은 수습하지 말고, 그 재를 산에 뿌리라.”고 당부했다고 전한다. 비문은 영축총림 통도사에 있다.
교학 연찬과 참선 수행은 물론 범패·서예 등에도 능통하였으며, 정화 불사에 앞장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청정하고 소박한 생활로 무소유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수행자의 본보기로 남아 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