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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영신

한글전강영신
한자田岡永信
유형인물
키워드만공, 판치생모, 6·25, 무문관, 용주사
시대근현대(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출생1898
입적1975
전강(田岡)
주요 주석처인천 용화선원
탑 소재지인천 용화선원, 해남 대흥사
비 소재지인천 용화선원, 해남 대흥사
참선 수행으로 한국불교 중흥을 이끈 수좌.
만공 스님 법제자로, 평생 참선 수행하며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참선을 강조하며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을 가르쳤다.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부친 정해용과 모친 황계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영신(永信), 법호는 전강(田岡)이다. 1914년, 해인사에서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인공 스님을 득도사로 출가했다. 교학을 연찬하다 도반의 입적을 보고 인생무상을 깨닫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1921년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 깨우쳐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가는구나. 23세에 혜월·만공·한암·보월·용성·혜봉 스님에세 인가를 받았으며, 25세에 만공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만공 스님이 전한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한 바 없고,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峰(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에 있구나. 통도사, 법주사, 망월사 등 선원에서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6.25전쟁 기간에는 광주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수행을 했다. 낮에는 가게 일을 보고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인 후 제자인 송담 스님과 오후 11시 30분부터 화두를 참구했다. 전쟁이 끝나고 인천 용화선원에서 15년 동안 참선을 통한 본래면목의 회복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설했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이 왔다가 잠깐 부귀(富貴)하는 것이 뜬구름 같으며, 공명(公明)도 달팽이의 뿔 같은 것”이라면서 “내가 나를 깨달아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여 나도 구하고 널리 중생도 제도하는 일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당부했다. ‘앞니에 털이 난다’는 의미의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화두로 잡고 정진하였다. 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 조실, 1967년 천축사 무문관 조실, 조계종 장로(長老)를 역임하고, 1970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했다. 1974년에는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 조실을 지냈다. 1975년 1월 13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고(如何是生死苦)인고?”라 묻고, 할(喝)을 한 후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라는 마지막 설법을 하고 입적했다. “구는 아무리 뒤집어 일러도 팔십일이니라.” 세수 78세, 법랍 61년. 유지에 따라 다비 후 사리를 남기지 않고 서해에 산골했다. 활구 참선을 제창하며, 후학들이 참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700여 개의 육성 테이프로 법문을 남겼다. 저서로 『전강법어집』이 있다. 제자로 송담, 정공, 정우, 정대 스님 등 50여 명이 있다. 한국불교의 선맥을 계승하면서 구도와 생사 문제의 해결을 제시한 선지식으로 평가받는다.
· 집필자 : 이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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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친 사람을 찾아서(전강평전)
    도서 정휴 | 서울:우리출판사 | 2000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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