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운암 김성숙 |
|---|---|
| 한자 | 雲巖 金成淑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임시정부, 국무위원, 봉선사, 의열단, 건국훈장 |
| 시대 | 근현대(일제강점기, 대한민국) |
| 출생 | 1898년 |
| 입적 | 1969년 |
| 호 | 운암(雲巖) |
| 이칭 | 김성숙(金成淑), 성암(星巖), 충창(忠昌), 규광(奎光), 창숙(昌淑), 야광(夜光) |
| 주요 주석처 | 남양주 봉선사 |
| 탑 소재지 | 국립현충원(묘소) |
독립운동과 혁신 정치에 헌신한 승려 출신 혁명가
스님으로 출가하였지만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해방 후 혁신정당을 이끌고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한 혁명가이다. 민족해방과 사회개혁에 헌신한인물로 평가받는다.
1898년 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했다. 가족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으로 이주하였다. 어린 시절 대한독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문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1916년 독립운동을 꿈꾸며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뜻을 바꿔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하였다.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하면서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후, 불교계와 혁명운동을 연결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대 조선무산자동맹과 의열단 활동을 펼치며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선전부장을 지냈다. 1923년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해 『혁명』과 『민족전선』 등을 간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1928년 중산대를 졸업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 설립에 참여해 지도위원 및 정치부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 1944년 4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몽양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에 힘썼고,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활약했다. 1957년 이승만 정부 시절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사회대중당·통일사회당·신한당·신민당 등에서 활동했다.
1969년 4월 12일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장례는 ‘운암 김성숙 선생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장례위원회 회장은 유진오, 부회장은 김성곤·김현옥 등 15명. 영결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거행됐다. 노산 이은상은 “지나간 일제강점기 역사의 어두운 밤을 지켜 주던, 독립정신의 값진 별이 또 하나 이 하늘 아래서 사라져 갔다.”라고 애도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7월 28일 국립묘지로 이장해 안장되었으며, 2008년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05년 설립된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가 유지를 계승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고, 좌우합작운동과 혁신정당 창당에 앞장서는 등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