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영암 임성(박기종)

한글영암 임성(박기종)
한자暎巖任性
유형인물
키워드삼보정재, 불교정화, 해인사, 봉은사, 종무행정
시대근현대(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출생1907년
입적1987년
영암(暎巖)
이칭박기종(朴淇宗)
주요 주석처서울 봉은사, 합천 해인사
탑 소재지서울 봉은사, 합천 해인사
비 소재지서울 봉은사, 합천 해인사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종단을 반석에 올린 승려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하며 삼보정재를 엄격하게 관리한 ‘불교계의 청백리’로 평가받는다. 1907년 8월 19일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발심하였다. 17세(1924)에 양산 통도사에서 주청담(朱淸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구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한 뒤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1932년 청담, 자운, 종묵, 혜천 스님 등과 울진 불영사에서 3년 결사를 했다.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청규(淸規)로 3년 결사를 마치는 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理事本無二(이사본무이) 이와 사는 본래 둘이 아니요, 事事無罣碍(사사무괘애) 사와 사는 걸림 없어라. 萬法盡三昧(만법진삼매) 만 가지 법이 삼배에 구하여, 樂山樂水去(요산요수거) 산 좋고 물 좋은 곳 가리라. 사찰 재정 및 재산 보호에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했다. 1938년에는 월정사 재무로 사찰림(林)을 수호하고, 해방 후에는 월정사 총무로 사찰을 외호했다. 1961년 해인사 주지 시절 매년 3월 봉행하는 정대불사(頂戴佛事)를 창안해 재정 위기를 해결했다. 또한 분배 농지 환수 문제에 대해 대법원에서 승소해 해인사 농지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 불교 정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불교계의 재산 보전과 사찰의 재정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해인사(1965), 봉은사(1975) 주지로 사찰 재산을 보호하고 도량을 확장했다. 대한불교조계종 감찰원장(1964, 1976), 총무원장(1967, 1975), 중앙종회 의장(1974), 원로회의 의장(1978)과동국대 이사장(1968, 1979), 동국역경원장(1979)을 지내며 종단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1987년 6월 3일 오전 7시 30분 서울 봉은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80세, 법랍 65년.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법신본무생(法身本無生) 법신에는 본래 태어남이 없으니, 사대원무실(四大元無實) 육신에도 원래 실한 것이 없네. 색공무이도(色空無二道) 색과 공이 둘이 아니, 청풍자거래(淸風自去來) 맑은 바람만 스스로 오고 가네. 저서로 『마음 없는 마음』,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법문집)가 있다. ‘열 가지를 모른다’라는 뜻의 ‘십부지(十不知)’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출가자는 간식, 차(茶), 과일, 떡, 낮잠, 구경, 여행, 화초(花草), 서화, 골동품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행정력과 수행을 겸비하여 해인사, 봉은사 등 주요 사찰을 발전시키고 종단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
· 집필자 : 이성수

관련자료

  • 韓國高僧碑文總集 : 朝鮮朝·近現代
    도서 李智冠 編著. | 伽山佛敎文化硏究院 | 2000 상세정보
  • 더보기  +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