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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괘불도

한글영산회괘불도
한자靈山會掛佛圖
유형문화예술
키워드괘불도, 괘불이운
세부장르회화
시대조선 후기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대형 불화
조선 후기 수륙재나 영산재 등 야외에서 설행하는 의례에서 사찰의 마당에 대형불화인 괘불도를 거는데, 괘불도 가운데 『법화경』에 근거하여 영산회를 주제로 그린 불화를 영산회괘불도라 한다. 괘불도는 17세기에 간행된 수륙재 의례집에 괘불을 옮기는 의식인 「괘불이운(掛佛移運)」 항목이 있고, 괘불도의 가장 이른 작품도 1622년(광해군 4)에 제작된 인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무렵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부터 등장한 괘불도는 실내에서 치를 수 없는 큰 규모의 야외 의식을 위한 그림으로, 통상 10여 미터 이상의 길이에 폭도 7~8미터에 이르는 대형 화면에 그린 불화이다. 사찰 마당에서 진행되는 야외 의식에는 다양한 의식단(儀式壇)이 마련되는데, 괘불도는 상단(上壇)에 큰 화면으로 위치하게 되어 의례 참석자들에게 부처의 현현성을 드러내며 불보살이 의례에 강림하는 느낌을 강렬하게 준다. 괘불도 도상은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靈山會)괘불도, 화엄신앙을 토대로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그린 삼신불(三身佛)괘불도, 석가모니를 보살의 모습으로 그린 장엄신(莊嚴身)괘불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영산회괘불도는 영산회 의식과 관련성이 깊다. 의례집에 의하면 영산회는 여러 종류의 재(齋)에 앞서 불보살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의식의 목적이 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천도재이든, 오랜 가뭄 끝에 비를 비는 기우재(祈雨齋)이든 죽어서 갚아야 할 생전의 업을 미리 갚는 예수재이든 영산작법으로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린 후 본격적인 의식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전반경의 영산회는 전각 내에 봉안된 불보살에 대한 공양의식인 상단권공(上壇勸供) 및 본 재에 앞서서 행하는 소규모 의식이었으나, 점차 독립된 의식으로 체계화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괘불재(掛佛齋)’는 수륙재(水陸齋), 예수재(預修齋)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천도의식인 사십구재(四十九齋), 조성 불사(造成佛事) 이후에 거행되는 점안의식(點眼儀式)이나 기우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의식에서 그 시작은 현실의 도량을 영산회상으로 만들어 주는 영산회로 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법화신앙의 대중적 인기와 영산교주 석가모니불의 신앙적 위치에 의해 영산회는 대부분의 불교 의식을 포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의식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를 그린 영산회괘불도는 1622년(광해군 14)에 제작된 이나 1653년(효종 4)에 제작된 은 물론 1920년에 제작된 와 같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20세기까지 꾸준하게 그려졌다.
· 집필자 : 김현중(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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