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화엄석경 |
|---|---|
| 한자 | 華嚴石經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화엄사 |
| 연도 | 8~9세기 |
| 시대 | 통일신라 |
| 공간 | 신라 |
| 관련장소 | 화엄사 |
| 관련인물 | 연기, 벽암 각성, 계파 성능 |
지리산 화엄사에 전하는 통일신라시대의 『화엄경』 석경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전하는 통일신라시대의 『화엄경』 석경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단편만 남아 있다.
화엄사는 신라 경덕왕 대(742~765)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 화엄사에서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이 만들어져서 3층의 장륙전(丈六殿) 내부를 장식하였다. 근대기 화엄사의 강백인 진진응(陳震應, 1873~1941)은 이 화엄석경에 797년 당의 반야(般若)가 한역(漢譯)한 정원본(貞元本) 40권본 『화엄경』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한역 『화엄경』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화엄본, 실차난타(實叉難陀)의 80화엄본, 그리고 반야의 40화엄본 세 종류가 있다. 진진응의 말에 근거해 화엄석경이 8세기 말이나 9세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755)의 변상도와 서풍을 비교한 결과 화엄석경이 8세기 전반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나왔다.
화엄사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도 지리산의 명찰로서 사격을 유지하였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일본군에 의해 전각 500여 칸이 전소되면서 장륙전에 있던 화엄석경도 불에 탔다. 1630년(인조 8) 벽암 각성(碧巖覺性)이 주도하여 중창 불사가 시작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일차 완공되었다. 이어 1699년(숙종 25)부터 1702년(숙종 28)까지 계파 성능(桂坡性能)이 다시 중건하여 2층 70칸으로 조성하고, 이름을 장륙전에서 각황전(覺皇殿)으로 개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각황전을 해체 보수할 때 화엄석경의 파편들이 수습되었는데, 한국전쟁 때 석경의 파편을 담은 상자가 파손되었다. 1961년 9월 8일부터 한 달간 이를 정리한 결과 약 14,000점의 경편이 나왔고, 이를 대·중·소로 나누어 160여 상자에 분류·정리하였다. 화엄석경은 네모난 벽돌 형태로서 아래와 위의 홈을 이용해 건물 벽에 고정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부 조각에 부조(浮彫)된 문양과 선각(線刻)이 확인되는데, 화엄변상도의 일부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방산(房山)석경을 비롯해 돌에 경전을 새기는 석경 조성이 유행했지만, 한국에서는 화엄사의 화엄석경 외에 경주 배리에서 수습된 법화석경(法華石經),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에서 나온 금강석경(金剛石經) 파편 등 일부 사례만 남아 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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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전二層殿의 화엄 석경石經은 가증스런 왜구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7층탑은 신병神兵의 보호로 유지되었으니, 감탄하게 됩니다. 여덟 사찰과 아홉 암자의 장관은 그림처럼 고운孤雲(최치원)의 필체로 묘사되었고, 세 전殿과 네 보寶의 웅장함은 벽암碧嵓의 비에 흠씬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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