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의승장 |
|---|---|
| 한자 | 義僧將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팔도도총섭, 의승군, 청허 휴정, 사명 유정 |
| 시대 | 조선 중기 |
| 관련장소 | 법흥사 |
| 관련인물 | 청허 휴정, 사명 유정, 기허 영규, 뇌묵 처영 |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승군을 이끈 의승 대장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승군을 이끈 의승 대장으로 청허 휴정, 사명 유정, 기허 영규, 뇌묵 처영 등이 유명하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월에 선조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을 8도 16종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으로 임명하였다. 국가적 위기 속에서 휴정은 평안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5천 명이 넘는 의승군을 일으켰다. 황해도에서는 제자 의엄(義嚴)이 총섭이 되었고, 관동의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과 호남의 뇌묵 처영(雷默處英, 생몰년 미상)을 비롯해 각지에서 여러 승장이 승군을 모아 궐기하였다.
휴정은 선조에게 “나라 안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자들은 신이 이미 명해 각자 있는 곳에서 수행하며 신령의 도움을 기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이 모두 소집해 오게 하여 종군하게 하려 합니다. 신 등이 비록 군역을 지는 부류는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은혜와 훈육을 입었는데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서 충심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8월에는 충청도의 기허 영규(騎虛靈奎, ?~1592)가 이끄는 800 의승이 조헌(趙憲, 1544~1592)의 700 의병과 힘을 합쳐 일본군이 차지한 청주성을 되찾았으나, 얼마 후 금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이 사건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의승군의 충심과 전투력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규는 유정과 함께 밀양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전쟁 중에 의승군을 통솔하며 업적을 남긴 대표적 의승장으로는 팔도도총섭을 지낸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 있다. 유정은 금강산에서 강원도의 승병 800명을 일으켰고 전쟁에 참전했을 뿐 아니라 산성 수축 등에도 힘썼다. 일본군의 정세를 탐문하고 적장과 담판했으며, 전쟁 후에는 조선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피랍 동포를 귀환시키고 국교 재개 문제를 논의하였다. 뇌묵 처영도 유정과 마찬가지로 휴정의 제자였는데, 호남에서 1천 명의 승군을 일으켰고 행주산성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전라도 각지의 산성을 수축하였다. 공을 인정받아 18세기에 휴정, 유정과 함께 해남 표충사에 향사되었다. 승장으로 활약한 이들은 총섭(摠攝) 등의 승직을 제수받고 승군을 통솔했는데, 기암 법견(奇巖法堅, 1552~1634),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 제월 경헌(霽月敬軒, 1542~1632) 등 휴정의 문도가 많았다.
의승장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의승군을 일으켜 활동한 이들로 청허 휴정‧사명 유정‧기허 영규‧뇌묵 처영 등이 유명하며, 이들은 뒤에 국가에서 정식으로 제사를 지원해주었다. 의승군 활동은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었고, 조선 후기 불교 존립의 기반이 되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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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壬辰(1592)년 변란 후에 의승장義僧將이 되어 영남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한번 만나자고 요청하므로 송운松雲 대사가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니 적들이 몇 리를 나열해 선 것이 마치 창검을 묶어 세워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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