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의승군 |
|---|---|
| 한자 | 義僧軍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팔도도총섭, 청허 휴정, 사명 유정, 벽암 각성, 방번제 |
| 시대 | 조선 중기~조선 말기 |
| 공간 | 남한산성, 북한산성 |
| 관련장소 | 개원사, 중흥사 |
| 관련인물 | 청허 휴정, 사명 유정, 기허 영규, 벽암 각성, 계파 성능 |
임진왜란 당시 자발적으로 조직한 승려 군대로서 이후 남·북한산성 승군의 별칭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승려 군대를 가리키는 말로, 조선 후기 남·북한산성 승군의 별칭으로도 사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이 전국에서 5천 명의 승군을 모았는데, 당시 의승(義僧)은 의병(義兵)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의승군은 평양성‧행주산성 등 주요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산성 축성 및 방어, 군량미 조달 등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의승군을 이끈 것은 청허 휴정과 그 뒤를 이어 팔도도총섭이 된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이었다.
의승군 활동으로 불교계는 효나 충 같은 윤리를 저버렸다는 기존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살아 있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불교신앙이 널리 확산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찰을 중건하고 교단을 재건할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 주축을 이룬 계파와 문파 형성의 토대가 된 것이 의승군이었다.
1626년(인조 4)에 완성된 남한산성 축성에도 승군이 동원되었고, 이때 승군을 통솔하는 팔도도총섭으로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이 임명되었다. 산성 내에는 개원사(開元寺)를 수사찰로 하여 모두 아홉 개의 사찰이 설치되었는데,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의 방비를 맡았다. 17세기 중반 효종 대에는 의승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며 남한산성 승군과 승역이 정책적 논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완성되어 중흥사(重興寺) 등 열한 곳의 승영(僧營) 사찰이 건립되고, 계파 성능(桂坡聖能)이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1714년(숙종 40)에는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가 정비되었다. 남·북한산성에는 승군 약 350명이 1년에 여섯 차례에 걸쳐 윤번 교대하였는데, 이를 합치면 두 산성에 연간 700명 규모의 승군이 동원되었다. 여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승려들이 돌아가며 올라와 번을 섰다. 남·북한산성에는 팔도도총섭이 임명되어 전국 승려의 동원과 산성의 승군 관리를 총괄하였다. 이처럼 남·북한산성의 의승군 제도가 안착하면서 승역이 국가의 운영 체제 안에서 제도화되었다.
의승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승군 조직으로 이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승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의승군 전통이 지속되었다. 의승군을 이끈 것은 최고위 승직인 팔도도총섭으로서, 갑오개혁 때인 1895년(고종 32)까지 이어졌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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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신을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삼고 도총섭의 의승을 주시니, 모두 2천여 명으로 대동강 남쪽을 건너 평양과 중화中和를 왕래하는 적을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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