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승역 |
|---|---|
| 한자 | 僧役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총섭, 월정사, 전등사 |
| 시대 | 조선 후기 |
| 공간 | 남한산성 |
| 관련장소 | 각화사, 안국사, 월정사, 전등사 |
조선 후기 국가에서 승도에게 부과한 각종 역
조선 조정이 승도에게 부과한 특정 역할로, 조선 후기 국역 시스템 내에서 승도와 사찰이 담당해야 했던 역(役)이다.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은 불교 재생의 중요한 계기였을 뿐 아니라 승려 노동력과 사찰 경제력의 제도적 활용이라는 정책 변화를 낳았다. 국역 체계 안에서 승역을 운영하게 된 것은 전란을 겪은 뒤 양역(良役)이 급감하고 정부의 재정 예산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승역은 궁궐, 산성, 능묘, 제방 등의 조영에 활용되었다. 특히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축성을 기점으로 승군의 산성 수축과 방비가 승역의 전형으로 확립되었다. 또 17세기 중반부터는 사찰이 담당하는 특정한 역할로 종이를 만드는 지역(紙役)이 추가되었다.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의 경우처럼 승도의 노동력을 쓰는 대가로 승역을 진 승려에게 호패나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또 임진왜란 당시의 전통을 이어 승군을 통솔하는 총섭직이 유지되었고, 예조에서 관리하였다. 남한산성 도총섭을 비롯하여 사고(史庫), 국왕의 제전(祭奠) 및 왕실 원당 사찰 등에 승군이 배정되고 총섭이 임명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 『선원록』 등 주요 국가기록이 봉안된 강화도 정족산, 강원도 오대산과 태백산, 무주 적상산의 4대 사고는 총섭의 책임하에 승군이 지켰으며, 각 사고의 수호 사찰은 전등사(傳燈寺)‧월정사(月精寺)‧각화사(覺華寺)‧안국사(安國寺)였다.
승역을 원활히 운용하기 위해서는 승려를 호적대장(戶籍臺帳)에 등재하여 관리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그 결과 17세기 후반부터는 본향(本鄕)의 호적에 승려를 기재하는 등 승려를 직역의 하나로 보았다. 이후 1750년(영조 26) 양역을 경감시킨 균역법(均役法) 시행 이후 승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정책적으로 승역 감소 및 정액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결국 사찰이 피폐해지고 승려가 줄어드는 ‘사폐승잔(寺弊僧殘)’ 현상이 발생하여 사원경제에 큰 부담을 초래하였다.
승역은 국가가 승도와 사찰을 관리·운영하는 제도였다. 승역을 통해 불교계는 국가의 재정 운용에 큰 역할을 했고, 승도는 승역을 통해 공민(公民)이라는 합법적 계층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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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역僧役의 무거움을 일반 백성들의 부역에 비교하면 몇만 배나 더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조아릴 전전殿前이 없고 밑으로는 하소연할 수령이 없으니, 이것이 저희의 다섯 번째 애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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