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조포사 |
|---|---|
| 한자 | 造泡寺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능침사, 승역, 원당 |
| 시대 | 조선 후기 |
| 관련장소 | 검단사, 용주사 |
조선 후기에 왕실 능·원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사찰
조선 후기에 왕실 능·원(陵園)의 제사에 필요한 두부 등의 물품을 공급하던 사찰이다.
조포(造泡)는 두부를 만든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 왕실 능묘에서 행하던 제사에 두부 등 제수(祭需)를 조달하던 사찰이다. 조선 전기에는 능묘에 능침사(陵寢寺)나 원찰(願刹)이 지정되었는데, 점차 그 위상이 격하되어 조포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기능도 망자의 명복을 비는 대신 제물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다만 왕릉을 제외한 세자나 후궁 등의 원묘(園墓)에는 진영이나 위패를 봉안한 어실(御室)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조포사가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여러 왕릉의 관리 문서를 모아놓은 『각릉등록(各陵謄錄)』(1716~1735)이다. “장릉(長陵: 인조)의 능침사인 파주 검단사(黔丹寺)에서 제향할 때 조포를 하는 일이 중대하다.”라고 하여 조포사의 존재가 확인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세조, 그리고 중종의 능침사였던 봉선사‧봉은사 등도 조선 후기에는 조포사로 불렸다. 조포사는 예조와 내수사에서 관리하였고 대부분의 왕릉과 원묘에 배정했는데, 물품과 노동력을 승역(僧役) 형태로 제공하고 산림 보호에도 이바지하였다.
조선 후기 조포사의 현황 및 관련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공문서철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30년 5월에 전국의 조포사를 조사한 문서를 모은 것으로 총 51사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예조와 내수사에서 내린 완문의 내용도 볼 수 있는데, 조포사에는 제수용 물품 외의 다른 과도한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승역 부담이 컸던 조포사에는 조포속사를 부속시켜 재정적 보조를 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세자와 정조의 융·건릉의 조포사 역할을 했던 용주사(龍珠寺)에는 영암 도갑사(道岬寺)와 장흥 보림사(寶林寺)를 조포속사로 지정하였다. 조포사는 1908년 대한제국에서 국가의 제향 횟수를 줄이고 사당을 통폐합한 ‘향사이정(享祀釐正)’을 시행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의 조포사는 능침사나 원찰이 망자의 명복을 빌고 축원을 한 것과 달리 두부 등 제수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만 하였다. ‘승역을 담당하는 사찰’이었던 조포사는 왕실과 불교의 밀접한 관계가 조선 후기에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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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은 자기의 생모인 육상궁毓祥宮 최씨의 위패를 그 절에 봉안하고 30결結의 토지와 이 일을 감당할 민호民戶를 내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한편 양주楊州 효령원孝寧園 조포사造泡寺를 왕실의 안녕과 홍복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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