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나한도 |
|---|---|
| 한자 | 羅漢圖 |
| 유형 | 문화예술 |
| 키워드 | 아라한,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 독성, 나한상, 독성도, 응진전, 나한전 |
| 세부장르 | 회화조각 |
| 시대 | 고려~근대 |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인 나한을 그린 불교회화
불제자로서 수행 끝에 일체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인 나한을 그린 불화를 말한다. 나한은 본래 산스크리트어인 ‘Arhat’의 한자 음역어인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좁은 의미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출가수행자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를 얻은 자를 가리켰으나,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위력으로 중생들을 보살피고 구제하는 존재로 그 의미와 역할이 확대되었다. 응공(應供), 복전(福田), 무학(無學),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나한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인도에서 성립되었지만 중국 당나라 스님 현장(玄奘, 602?~664)이 『법주기(法住記)』를 한역한 이후 나한신앙이 세분화되고 성행하여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난과 천재지변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나한재와 오백나한재가 빈번히 개최되면서 나한전을 건립하고 나한상과 나한도의 제작도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나한도의 제작은 통일신라 말엽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나, 현존하는 작품은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의 것만 전한다. 고려 초인 923년 중국 후량(後梁)에서 오백나한도를 가져와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모셨다는 기록, 고려 말 이성계의 발원으로 오백나한상을 만들어 석왕사(釋王寺)에 모시고 의식을 치렀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나한도는 한 화면에 한 분의 나한만을 그리는 형식과 16나한이나 18나한을 한 화면에 모두 그린 십육나한도와 십팔나한도, 500나한을 그린 오백나한도로 나뉜다. 현존하는 나한도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은 고려시대인 1235년과 1236년에 제작한 것으로 국내외에 13점 정도가 알려져 있다. 모두 한 폭에 한 분의 나한을 그렸는데 화면에 적은 나한의 존호를 통해 16나한도와 500나한도가 함께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그중 500나한도에는 『법화경(法華經)』의 「오백나한수기품」이나 중국에서 신봉하는 오백나한과 다른 존호가 등장한다. 이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불교의식집인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1805, 은해사 간행본)에서 확인되는 명칭으로 우리나라 오백나한신앙의 특징이다.
그 밖에 고려시대 나한도로 한 폭에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의 조합인 석가삼존과 함께 오백나한을 그린 〈오백나한도〉[14세기,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석가삼존과 16나한을 함께 그린 〈십육나한도〉(14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전한다.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는 문정왕후가 발원하여 제작한 나한도 200점 중 〈향림사 제153 덕세위존자도〉(1562,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 소장) 1점이 전한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십육나한도 제작이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 십육나한도는 청록의 산수를 배경으로 다양한 자세의 나한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17세기 조선에 전래된 중국의 화보집인 『삼재도회(三才圖會)』와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蹤)』에 실린 삽화가 이용되었고, 18세기 나한도의 전형이 되어 19세기까지 유사한 흐름을 유지하였다. 18세기 대표작으로 여수 〈흥국사 십육나한도〉(1723), 순천 〈송광사 십육나한도〉(1725)가 있다. 또한 김해 은하사 대웅전이나 양산 통도사 영산전과 같이 사찰의 전각 내외부를 장식하는 단청과 벽화의 소재로 나한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나한도는 중국에서 전해온 소설이나 도석인물화의 유행으로 나한도에 등장하는 소재가 더 풍부해졌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한, 화면을 분할하여 등장인물을 나누어 그리는 방식을 적용하여 한 폭에 칸을 4칸에서 16칸으로 나누어 16나한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한의 신통력을 빌려 외우내환 극복, 가뭄 극복, 시험 합격, 가족의 건강과 장수 기원 등 다양한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나한상과 나한도를 조성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나한의 신통력에 기대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나한상과 나한도를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십육나한도는 영산회상도와 짝을 이루어 함께 응진전이나 나한전에 봉안하였다. 나한전과 같은 별도의 전각이 없는 사찰의 경우 주불전인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에 다른 존상들과 함께 나한상을 봉안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 집필자 :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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