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산대극 |
|---|---|
| 한자 | 山臺劇 |
| 유형 | 문화예술 |
| 키워드 | 산대탈춤, 사자무, 야류, 사찰악가무, 오광대 |
탈을 쓰고 춤과 재담을 하는 전통 연희
예로부터 사찰은 궁중과 막역한 관계를 지니며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송나라의 사찰은 그 마을의 광장이자 오락장이 되어 경전을 노래하는 설창, 부모은중경과 같은 가요를 유행시켰고,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사』 원년, “산대악인이 악관(樂官)과 함께 꽃과 주과(酒果)를 나누며 가무와 놀이를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통일신라 시기에 이와 같은 사찰산대극이 행해져 왔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조 산대놀이는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와 관련이 있고, 여기에는 서역과 연결되는 문화적 맥락이 있다. 고려조 1273년 2월, 왕이 봉은사에 올 때 기회(伎會)의 규모가 1,350이 넘었고, 이들이 주악을 연주하고, 북 치고, 나팔을 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굉진천지(轟震天地)하였다.
고려조에 사찰에서 행해진 산대극은 조선조를 지나며 풍자극으로 변했다. 오늘날 탈춤으로 표현되는 풍자극의 내용을 보면, 여인을 희롱하는 파계승, 양반들의 허세와 부조리, 조강지처 할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탈춤의 각 지역의 전승 현황을 보면, 함경도에는 북청사자 놀음, 황해도에는 봉산・강령・은율 탈춤, 강원도에는 강릉관노 놀이, 경상북도에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서울・경기에는 양주별산대・송파산대・퇴계원산대 놀이, 경상남도에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수영야류, 낙동강 서쪽의 고성・통영・가산 오광대 등이 있다.
이들의 명칭을 보면, 놀음・놀이・탈춤・야류・광대 등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주요 골격과 성격은 대동소이하여 고려조 사찰 가무악과 연결된다. 이 외에도 경향 각지에서 행해지는 산대 혹은 탈춤류의 민속놀이를 보면, 정월과 초파일을 보내느라 굉진천지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산대극의 큰 틀은 중마당, 양반마당, 할미마당으로 구성된다. 중마당은 파계한 승려가 먹중들에게 조롱당하고, 술주정뱅이 취발이에게 얻어맞고 쫓겨 모습 등이 연출된다. 양반마당은 하인 말뚝이가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할미마당은 젊은 첩과 노느라 고생하며 자식을 키워온 할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양반마당과 할미마당은 조선시대 남정네들의 횡포이자 욕망과 불만의 분출구로써 조선조의 여성 비하적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산대극에서 연행되는 사자춤과 같은 연행은 고려시대 산대극과 통일신라 향악잡영오수의 잔재를 엿 볼 수 있게 한다. 중마당에는 ‘옴’이 두 막대기를 치다 상좌에게 빼앗기고, 제금을 치려다가도 빼앗기고, 제금으로 가슴과 등을 맞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두들겨 맞는 것은 정신 차리지 못한 인물이 제지를 받는 내용으로, 불도를 이루고자 외도를 몰아내는 사찰 교훈극과 연결되는 맥락이 있다.
일본의 고문헌 『교훈초』를 쓴 고마노 치카자네(狛の近真, 1177~1241)는 가마쿠라 시기 고후쿠지(興福寺)의 전속 악사였다. 그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스고이 천황(推吉天皇) 20년(612) 조에 “백제의 미마지가 오(吳)에서 기악(技樂)을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곡물어(高麗曲物語)의 절차와 내용을 기록하였다.
국악학자 이혜구(1909~2010)는 1953년에 발표한 「산대극과 기악」 이후 30년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치카자네가 기록한 『교훈초』의 절차가 한국의 산대극과 동일함을 주장하였고, 서정완은 「技樂 追跡考-『敎訓抄』 해석과 한・일 가면극 연구」에서 미마지와 가마쿠라 시기까지 일본 가면극의 변천을 조명하였으며, 2021년에는 윤소희가 불교문화와 악가무로서의 『교훈초』를 재조명하였다. 그 결과 치카자네의 성(性) ‘고마’는 신라・고려를 통칭하는 명칭이고, 교훈초는 한반도에서 전해진 불교 홍법 악가무였음을 주장하며, 현재 풍자 일색의 중마당을 독립시켜 본래의 홍법산대극으로 되살려볼 것을 제안하였다.
· 집필자 : 윤소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