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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예인 집단

한글떠돌이 예인 집단
한자流浪藝人集團
유형문화예술
시대조선 중기~근대
관련인물민속 무형문화 전승 단체 및 보유자
유랑하며 가무를 하는 예인 집단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강제 환속한 승려들은 비승비속인 삶을 살았다. 불교의식과 행사에서 행해지던 다양한 노래와 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간의 놀이와 잡기, 무당들의 푸닥거리와 뒤섞이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민간에서는 학식과 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 불가에서는 출가하지 않은 재불 남자를 칭하는 거사 집단이 생겼고, 재불 여성으로 사당(社堂)이 형성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유민 일부가 거사 집단과 합류하여 떠돌이 예인 생활을 하면서 남(男)사당패가 되기도 하였다. 왕실의 사찰 후원이 차단되자 사찰의 빈약한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유랑 예인 집단과 불교의 전략적 제휴가 이루어졌다. 유랑예인들이 사찰의 신표를 받아서 염불・탁발가・승무를 추면 사람들이 더 많은 보시를 하므로 사찰 재정을 도우면서 자신들의 생계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유랑 무리들의 존재 양태가 다양해졌고, 이러한 모습을 조선시대의 감로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당패, 초라니패, 솟대쟁이패, 걸립패가 있었는가 하면, 걸립패에서 공연 장르를 달리한 중매구패, 광대패, 대광대패, 무동패, 애기장사, 풍각장이패, 남사당패, 굿중패로 변모되어 오다 붙박이 예인 집단인 선소리패까지 생겨났다. 대원군은 경복궁 낙성식(1878년)에 예인 집단을 초청하여 민악 큰마당을 펼쳤다. 여기에는 신라시대부터 향유되어 오던 불교 악가무를 민간으로 내쫓아 불교라는 색깔을 지워 다시 불러들인 측면이 있다. 한용운 스님(1879~1944)은 “의식이 번잡 혼란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 잡박해서 모두 도깨비의 연극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억불・임진란・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핍박해진 사찰살림을 위하여 불교적 법도가 허물어진 의례가 만연하였던 조선말기의 실상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례의 이러한 양상이 불교가 한국인의 삶에 더욱 깊이 스며들어 다양한 예술을 양산하는 역설적 현상이 되기도 했다.
· 집필자 : 윤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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