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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이정간보(32정간보)

한글삼십이정간보
한자三十二井間譜
유형문화예술
키워드32정간, 16정간, 32상호,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종묘제례악
시대조선 전기
연도1447년(세종 29)으로 추정
관련장소종묘, 국립국악원
관련인물세종, 세조, 김수온, 신미 대사
세종이 창제한 32정간보, 동양 최고의 유량악보
『세종실록』 31년 12월조에는 “임금이 막대기[柱杖]로 박자를 짚으며[擊地] 장단[節]을 삼아 곡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제반의 율정(律程)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조선조였지만 음의 시가를 표할 수 있는 악보가 없던 차에 세종이 32정간보를 창안함으로써 동양 최고(最古)의 유량악보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율명과 악제(樂制)에는 반드시 상징하는 숫자가 있었으나 32라는 숫자에 대한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불교를 배격하던 당시 정치 상황에서 부처님 상호와 관련 있는 숫자를 표면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32라는 수(數)는 고대 인도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다. 힌두의 베다경에는 니브르띠 락샤(Nivṛtti lakṣha)와 쁘라브르띠 락샤(Pravṛtti lakṣha)의 두 가지 다르마(法)가 있다. 니브르띠 락샤는 출세간의 해탈적 삶, 쁘라브르띠 락샤는 세속 삶을 위해 지녀야 하는 덕목이었다. 힌두 경전에서 비롯되는 고대 인도의 문학은 8악사라(운율) 4파다(행)에 의한 32운의 슬로까 운율이 되었고, 이는 힌두 사제들이 비나와 함께 게송을 읊는 운율로 애송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불교로 수용되어 세간・출세간의 덕상으로 묘사되다가 석가모니의 32상호로 정착되어 후기 불교에서는 『삼십이상품』이라는 경전이 단독으로 성립되었다. 『장아함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서 32상호에 대해 설하고 있다. 특히 『관찰제법행경(觀察諸法行經)』 「수기품(授記品)」에서는 “모든 천인의 지(支)가 되어 주고 …(중략)… 모든 중생이 있는 곳을 알고, 삽십이상의 깨달음을 설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세종・세조 대의 궁중악을 기록한 『악학궤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는 새로 지은 한글을 적용하여 “白花ㅣ芬其萼ᄒᆞ고(온갖 꽃들이 향기를 내뿜고)”로 시작하여 “妙應三十二와 無畏늘施衆生ᄒᆞ시니 法界普添利ᄒᆞᄂᆞ니라(설흔둘 묘음으로 응하시어, 두려움 없는 설법을 베푸시며, 법계를 널리 이롭게 하시니라)”라는 창사와 궁중악무가 있다. 이는 미타찬, 본사찬과 함께하는 악곡으로 32정간에 담긴 세종의 불교적 염원이자 한글과 정간보 창제가 하나로 연결되는 애민정신의 실현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통일신라는 음성서(音聲署)를 통해 악정(樂政)을 펼쳤다. 이러한 배경에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부터 한대(기원전 206~기원후 220)에 걸쳐 성립된 중국의 예악(禮樂) 정신이 있었다. “하늘에는 육기(六氣)가 있어, 내리어 오미(五味)를 만들고, 발하여 오색(五色)이 되며, 울리어 오성(五聲)이 된다.”라는 우주적 악론이 있었다. 이러한 악론의 실천 원리를 보면, “예(禮)는 천(天)의 경(經)이고, 지(地)의 의(義)이며, 천지의 경의(經義)가 있으면 민(民)은 그것을 본받는다.”는 군자의 덕목이요 예악의 사회화였다. 주대에는 12율(律)을 양(陽) 6율과 음(陰) 6려(呂)로 나누고, 5음을 5행(木·火·土·金·水)에 배치하였다. 음악은 율정(律程)의 수리(數理)에 의해서 성립되므로 기준음 황종을 백성들의 양식인 기장을 9알씩 9번(푼) 쌓은 81을 1척(尺)으로 하는 등, 한 음도 상징적 의미 없이 울리는 일이 없었고, 음계와 악조(樂調)의 수도 마찬가지였다. 제례악에 쓰이는 악기는 당시에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 즉 쇠[金]・돌[石]・명주실[絲]・대나무[竹]・바가지[匏]・흙[土]・가죽[革]・나무[木] 로 구성된 8음을 갖추어 우주를 울려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다.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 64개로 된 증후을편종(曾侯乙編鐘)을 연주하였던 것은 종의 두께, 크기에 따른 음정 배열의 산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천문학, 법률, 악률에 능했던 명・청대의 학자 주재육(1536~1611)은 전승되어 오던 악률 산식을 총망라하여 『신법밀률(新法密律)』을 펴내면서 서양의 평균율과 같이 실용적인 삼분손익법을 정립했다. 이토록 고도로 발달한 중국의 예악 사상과 악률 산식이 있었지만 음의 길이를 표시할 수 있는 유량악보는 없었다.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악정을 위한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두어 이전의 그 어떤 왕조보다 중국의 예악과 악정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여기에는 숭유를 추구한 정도전의 밑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 중심의 악정에서 주체적 행보를 하였다. 중국의 한자에서 벗어나 백성의 문자를 창제하고, 여민락을 지어 노래하며 백성의 모든 소리에 응답하는 묘응32음(妙應32音)의 염원으로 32정간보를 창안하였고, 세조는 음악적 기능성을 위하여 16정간보로 개조하였다.
· 집필자 : 윤소희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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