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가사불사 |
|---|---|
| 한자 | 袈裟佛事 |
| 유형 | 의례민속 |
| 키워드 | 사사공양, 승보공양 |
| 세부장르 | 의례, 민속(무형) |
출가수행자가 착용하는 가사를 지어 보시하는 일
부처님 당시부터 음식, 가사, 약, 침구는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올리는 사사공양(四事供養)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이기에, 승보(僧寶)에게 올리는 가장 소중한 공양으로 삼아 온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옷이자 출가자의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사불사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들어온 초기부터 승려의 가사를 지어 올리는 불사가 중요한 공덕으로 다루어졌다. 불교가 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가사 시주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356년에 공민왕 부부가 봉은사에서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 국사의 설법을 청해 듣고, 은발우와 수놓은 가사를 시주한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태종은 1408년 빈전에서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 법회를 열고 108명의 승려에게 가사와 발우를 시주하였다. 문종은 즉위하던 해(1450년)에 사찰에 비단을 시주해 가사와 좌구 불사에 사용토록 했고, 세종의 대상(大祥) 때는 5일간의 법회와 함께 승려 800명에게 발우와 가사 등을 차등 있게 시주하였다. 이 외에도 전국의 큰 사찰마다 가사불사가 행해지면서 이에 대한 불자들의 시주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가사불사는 삼보를 향한 일상의 보시이지만, 특히 조선 후기부터 윤달에 행하는 불교 풍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비일상적이고 조심스러운 윤달에 공덕을 쌓는 불사가 많았을 뿐 아니라, 윤달에 수의(壽衣)를 짓는 민간의 풍습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의를 미리 만들어 두면 장수한다’는 담론과 함께 윤달에 옷을 만드는 풍습이 있어, 출가자의 ‘가사 만들기’ 또한 윤달에 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찰에서는 윤달이면 도편수의 지휘로 양공(良工) 승려와 신도들이 정성껏 손바느질로 가사를 만들었다. 가사를 지을 때는 예불과 함께 바느질을 시작하고, 옷이 완성되면 증명법사를 모시고 가사점안(袈裟點眼)을 행한다. 점안으로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불법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가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가사불사는 가사 시주를 하는 이, 바느질하는 이, 가사를 받는 이가 모두 청정한 마음으로 임하여 함께 공덕을 쌓는 불교의식으로 전승되었다.
· 집필자 : 구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