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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터)

한글만복사(터)
한자萬福寺址
유형사찰
키워드김시습, 도선, 만복사저포기, 석조여래입상
주소전북 남원시 만복사길 7
관련인물도선(道詵), 김시습(金時習)
조선 전기 김시습의 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사찰
만복사는 통일신라 말에 도선(道詵, 827~898)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불법으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과 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 문종 때(재위 1046~1083)의 창건설이 신빙성이 높다. 현재 절터에 전하는 고려 전기 양식의 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등이 창건 시의 유물로 추정된다. 절은 수백 명의 승도가 머무는 대찰이었다. 대웅전과 영산전, 약사전, 천불전, 장륙전, 명부전, 보응전(普應殿), 나한전, 명부전, 종각 등의 많은 전각이 가람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시주를 구하기 위해 줄을 맞춰 오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이른바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라고 하였다. 조선 세조 때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이 절을 배경으로 불교 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지었다. 만복사에 살던 남자와 죽은 여자의 혼령이 나누는 사랑 이야기이다.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왜적이 방화하여 작은 불전과 석불만이 남았다. 1678년(숙종 4) 승방을 짓고 중건을 시도하였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절터는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가람의 중앙에 목탑이 있었다. 여러 건물지와 석조물들을 잘 정비해 두었다. 석조여래입상은 몸체와 광배가 하나의 석재이다. 광배에는 화불(化佛)과 연꽃, 불꽃무늬가 선명하다. 광배와 불상의 손 등이 파손되었으나 뛰어난 조각 기법을 보여 준다. 5층석탑은 지금은 4층까지만 남아 있고,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석조대좌는 불상의 받침대인데, 거대한 하나의 돌에 육각형의 3단 모습을 조각하였다. 대좌의 크기로 보아 불상의 크기와 법당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창건 당시의 유물인데, 별다른 장식이 없고 지주(支柱)를 고정하는 3개의 구멍이 남아 있다.
· 집필자 : 한상길

관련자료

  • 만복사: 발굴조사보고서
    도서 전북대 박물관 | 전북: 전북대 박물관 | 1986 상세정보
  • 만복사저포기에 나타난 사랑
    학술논문 이금희 | 어문논집 | 4 | 서울: 숙명여대 한국어문학연구소 | 1994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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