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고선사(터) |
|---|---|
| 한자 | 高仙寺(址) |
| 유형 | 사찰 |
| 키워드 | 원효, 『삼국유사』, 서당화상비 |
| 주소 | 경북 경주시 덕동 덕동댐 지역 |
| 관련인물 | 원효 |
원효가 주석한 7세기 중엽의 절터
고선사는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원효(617~686)가 이 절에서 수행한 사실이 『삼국유사』 「의해」 제5 ‘사복불언(蛇福不言)’에 전한다. 어느 날 사복은 모친이 죽자, 절에 찾아가 원효에게 “그대와 내가 옛날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같이 가서 장사지내자.”고 하였다. 원효는 축원하기를 “나지를 말아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를 말아라, 나는 것이 괴롭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라고 하였다. 사복이 그 말이 너무 길다고 하자 원효는 다시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괴롭구나(死生苦兮).”라고 하였다. 사복은 비로자나불의 화현(化現)이었다. 그는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또한 그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세계로 들어가려 하네.”라며 시신을 안고 연화장세계로 사라졌다.
1021년(고려 현종 12) 절에 있던 금라가사(金羅袈娑)와 불정골(佛頂骨)을 궁궐로 옮겨 왔다.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모른다. 1913년 절터에서 9세기 초(800~808)에 건립한 원효의 비,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단편을 발견하였다. 1975년 덕동댐 건설로 절터는 수몰되고 말았다. 발굴을 통해 금당·강당·중문·회랑 등 많은 건물터를 확인하였고, 금동불상과 기와, 벽돌 등을 수습하였다. 출토 유물과 삼층석탑, 석등의 받침돌, 귀부 등을 모두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 정상의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 석탑이다. 탑신의 4면에는 문틀을 조각하여 감실(龕室)을 나타냈다. 중앙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못 자리가 있으며, 문틀 안에도 상하에 못 자리가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앙화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경주 감은사지의 쌍탑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석등의 받침돌에는 8잎의 복엽연화문을 조각하였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용도인데 가로 56㎝, 세로 12㎝의 홈이 있어 크지 않은 규모의 비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서당화상비는 두께가 40㎝이므로 맞지 않는다.
· 집필자 : 한상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