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박윤진 |
|---|---|
| 한자 | 朴允進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1905 |
| 시대 | 근현대 |
| 출생 | 1905년 5월 2일 |
| 입적 | 미상(한국전쟁 당시 납북) |
| 호 | 호 대우(大愚), 법명 영해(領海) |
| 주요주석처 | 고양 흥국사 |
일제 강점기 불교청년운동에 참여한 인물
일제 강점기 때 불교청년운동에 참여하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이다.
1905년 5월 2일 출생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선 전하는 바가 없으며, 192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불교전수학교(지금의 동국대)에 입학했다. 이때 만당(卍黨)에 가입했다. 1924년 개운사 개운소년회(開運少年會) 문예부장, 1931년 불교청년총동맹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불교전수학교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일본 다이쇼(大正)대 종교학과를 졸업(1934)했다. 유학승들이 만든 잡지 『금강저(金剛杵)』 편집과 발행에 참여했다.
귀국 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명성학교 강사, 봉은사 순회 포교사, 경성방송 강연자,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1935년에 김경주의 주례로 혼인했다. 1937년 12월 중일전쟁 당시 불교계가 구성한 ‘북지황군위문사’의 일원으로 선발됐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다수의 친일 행적을 보였다. 광복 후에 반년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다, 1946년 잡지 『신생』에 「건국은 각자의 내적 건설에서」를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조선불교총무원 재무국장과 동국대 교수(부학장)로 재직하다, 1950년 7월 2일 종로 3가에서 인민군에게 납북됐다. 이때 거주지는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4통 5반’이다.
중앙불전 동기들은 『일광(一光)』 제3호에서 박윤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미산(漢美山) 찻노매라 서교(西郊) 접어 나서랴면, 흥국사(興國寺) 쇠북소리 하마 귀에 듯기는 듯, 박윤진(朴允進) 그리운 소식(消息) 예서 물어 보오리”
· 집필자 : 이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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