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무불 성관 |
|---|---|
| 한자 | 無佛性觀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1907 |
| 시대 | 근현대 |
| 출생 | 1907년 9월 20일 |
| 입적 | 1984년 3월 23일 |
| 호 | 무불(無佛) |
| 주요 주석처 | 장성 백양사, 담양 용화사 |
| 비 소재지 | 담양 양각사 |
참선 교학 겸비하고 후학 양성한 고승
참선 수행과 교학 연찬을 겸비하고 후학을 양성한 20세기의 고승이다.
1907년 9월 20일 서울(지금의 중구 오장동 2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영철(南永哲), 모친은 최씨(崔氏). 속명은 남점룡(南點龍). 본관은 의령이다.
14세에 계룡산 동학사에서 월암(月庵)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방해안(方海眼)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31년 1월 백초월(白初月) 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마쳤다. 1931년 8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설호(雪湖) 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했다.(1936년 1월) 이어 경성 개운사에서 박한영(朴漢永)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1938년 1월)
1939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滿空) 선사 문하에서 참선 수행 이후 유점사, 표훈사, 범어사 등에서 20하안거를 성만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강백(講伯)들에게 교학을 이수한 후 계룡산 동학사(1940년 9월~1943년 2월), 금강산 유점사(1943년 2월~1944년 1월)에서 강사(講師)를 지냈다. 1940년 유점사에서 대륜(大輪) 스님을 법은사로 모시고 무불(無佛)을 법호로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 강제징용으로 강원이 문을 닫으면서, 유점사 강원도 폐문(閉門)이 되어 강사직을 놓았다. 이후 전국을 만행하는 과정에서 일경(日警)에게 봉변을 당해 척추를 다쳤으며, 사경(寫經)과 참선을 위주로 수행했다.
한국전쟁 후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1951)과 동래포교당 주지(1957)를 지냈다. 1970년 부산 연화사를 창건하고, 1973년 동래 금용암 주지를 지냈다.
1984년 3월 23일(음력 2월 11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80세, 법랍 64년. 영결식은 부산 금용암, 다비식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엄수됐다. 입적을 예감하고 “부처님 은혜와 시주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면서 “사리를 절대 거두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입적 후 『불교신문』에는 “학문과 덕행(德行)이 뛰어났던 숨은 도인(道人)”이라면서 “청렴으로 80평생을 일관했고, 법화경 사경(寫經) 솜씨가 뛰어났던 고덕(高德)”이라고 소개되었다.
금강산 마하연 제3차 중건비문(1932), 금강산 마하연 헌답기념비문(1932), 금정사 방생비문(부산 동래), 미타암 신혜월선사비문(경남 양산), 운수사 사적비문(부산 북구 모라동), 금용암 사적비문, 삼십삼조사 전법게(박대륜 화상 회갑 기념) 등을 썼다. 1981년 평생 모은 소장품과 사경 작품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했다. 금니(金泥)금강경 4질을 써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범어사에 기증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