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대응 만우 |
|---|---|
| 한자 | 大應萬佑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1897 |
| 시대 | 근현대 |
| 출생 | 1897년 7월 6일 |
| 입적 | 1968년 2월 28일 |
| 호 | 대응(大應) |
| 주요주석처 | 법주사, 선학원, 대전 심광선원 |
| 탑소재지 | 대전 심광사 |
독립운동 참여하고 광복 후 통도사 주지 지낸 고승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에는 통도사의 주지를 지낸 고승이다.
1897년 7월 6일(양) 경남 양산군 물금면(당시 상서면) 범어리에서 출생했다. 1911년 6월 부산(동래) 범어사에서 출가해, 그해 9월 통도사로 이전입산(移轉入山)했다. 통도사에서 1914년 9월까지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며 치문(緇門)을 수학했다. 은사는 구하(九河) 스님의 사제인 곽원담(郭圓潭) 스님이다.
1914년 9월부터 1918년 3월까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사집(四集), 사교(四敎), 대교(大敎)를 수학했다. 1915년 4월 통도지방학림(중등과정)에 입학해 1918년 3월 졸업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통도사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할 때 강원에서 강론을 들으며 인연을 맺었다.
1919년 3월 양산군 하북면 신평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오택언(吳澤彦)이 만해 스님의 명을 받아 서울에서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받아 김상문(金祥文) 등 지방학림 대표들과 신평 장날을 기해 시위를 전개했다. 그날 밤에 구하 스님이 건네준 자금을 갖고 양양 낙산사, 설악산 신흥사, 금강산 건봉사·유점사·장안사·표훈사, 칠보산 개심사 등을 전전하며 피신했다. 만주 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여의찮아 묘향산 보현사로 갔다. 이때가 경신년(庚申年, 1920) 4월 8일(음력) 직전이었다. 초파일을 보현사에서 보내고 평양 영명사와 법흥사에 머물다 정방산 성불사를 거쳐 경성 각황사로 갔다.(1920년 6월 초)
1920년 9월부터 1922년 3월까지 불교중앙학림 2년을 수료했으며, 조선불교청년회(1920.9)에 가입했다. 1922년 3월 26일 친일 승려 강대련을 징치(懲治)하는 명고축출(鳴鼓逐出)에 가담했다. 이 사건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피신 생활을 하고 1928년 2월 통도사로 돌아왔다. 1928년 5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건당식을 갖고 대응(大應)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940년 5월까지 통도사 울산포교당, 마산포교당, 진주포교당 포교사와 울산 문수암 감원을 지냈다. 비밀 항일단체인 만당(卍黨) 사건과 관련, 1938년 9월 체포돼 진주경찰서와 진주교도소에서 두 달간 구금됐다. 1940년 5월부터 1944년까지 통도사 감무(監務), 1945년 10월부터 1949년 9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다. 이후 천성산 내원사 주지(1950년 1월~1953년 1월)와 양산 물금면 용화사 주지(1959년 2월~1968년 2월), 동국대 감사(1960년~1966년)를 지냈다.
1968년 2월 28일 입적했다. 상좌는 김성공 스님, 벽산(碧山) 임채옥(林采玉) 등이 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