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회광 유선 |
|---|---|
| 한자 | 晦光有璿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조선불교선교양종, 해인사, 원종, 임제종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62년 |
| 입적 | 1933년 |
| 호 | 회광(晦光) |
한일불교 병합 시도한 사판이며 강백
1862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경기도 양주라는 설도 있지만, 출가 전 이력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회광강백전(晦光講伯傳)」에 출가 후 상황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설악산 신흥사에서 설허(雪墟)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제방 사찰에서 내외전을 섭렵하고, 금강산 건봉사 보운긍엽(寶雲亘葉) 스님의 법맥을 이어, 환성 지환(喚醒志安) 스님의 9세 법손, 휴정(休靜) 스님의 13세 법손이 됐다. 강당(講堂)을 열었을 때 몰려온 학승들 때문에 1년 내내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33세(1894)에 건봉사에 주석할 당시 대강백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1906년 창립한 불교연구회에 참여해 명진학교(明進學校, 지금의 동국대)를 설립했지만, 친일의 길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7년 불교연구회 회장과 명진학교장에 선출됐다. 1908년 3월 한성부(서울) 원흥사에서 전국 승려 대표 52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대한국불교 최초의 종단인 원종(圓宗)을 설립했다. 사무기구는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이다. 이때 대종정(大宗正)에 선임됐다. 1909년 12월 150여 명이 원흥사에서 한성부에 불교총합소(佛敎總合所) 건립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세워진 사찰이 각황사(조계사)이다.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 직후(9월) 일본 조동종 관장 이시가와 소도우(石川素童)와 독단적으로 연합 조약을 체결해 조선불교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매종역조(賣宗易祖)의 비판이 제기되고,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오성월 스님 등이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전개하며 조선불교 수호에 나섰다.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각본산주지회의원(各本山住持會議院) 초대 원장(1913년 1월~1914년 1월)에 이어 3대 원장을 역임했다. 1914년 11월 불교진흥회 발기인 대표에 이어 1915년 1월 회주로 선출됐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1월 일본 임제종을 방문, 제2차 한일불교 병합을 시도해 물의를 빚었다. 1922년 1월 총무원 사무부장, 5월 교무원 이사, 12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로 선임됐다. 1924년 9월 합천 해인사 주지에서 물러났다.
1926년 전 위봉사 주지 곽법경과 일제의 힘을 빌려 조선불교를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뚜렷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며, 1932년 2월 3일 세수 71세, 법랍 53년으로 세연을 다했으며, 2월 7일 각황사에서 고별식(告別式)이 열렸다. 저술로 『목암집(牧庵集)』(2권)이 있다. 법명은 사선(師璿), 유선(有璿), 법호는 회광(晦光)이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