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춘성 창림 |
|---|---|
| 한자 | 春性昌林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망월사, 만공, 활구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91년 |
| 입적 | 1977년 |
| 호 | 춘성(春性) |
| 비소재지 | 김천 직지사 |
거침없는 활구(活句)로 대자유 경지를 보인 선사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인오(李仁五),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속명은 창림(昌林), 본관은 평창이다. 증언에 의하면 고향이 설악산 백담사 입구 주차장 인근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2리 907번지라고 한다. 법명은 춘성(春城)과 속명인 창림을 같이 사용했다. 법호는 춘성(春性)이다.
모친이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한다. 어려서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했으며, 9세에 어머니와 설악산 신흥사에 갔다가 불상을 본 후 출가의 뜻을 밝혔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 수년을 기다렸는데, 13세(1903)에 고향 인근의 백담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만해 스님이다.
20세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1915년 안변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했는데,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불릴 만큼 『화엄경』에 밝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만해 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때 정성을 다해 옥바라지했다. 스승을 염려하며 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만해 스님을 수시로 면회하면서 「조선독립의 서」를 전해 받아 범어사 스님을 거쳐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도록 했다. 만해 스님의 「조선독립의 서」는 1919년 11월 4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30세(1920)에 설악산 신흥사 주지, 35세(1925)에 안변 석왕사 주지를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의 1922년, 1924년, 1928년 ‘석왕사주지취직인가의건’ 서류에 춘성 스님 기록이 없어 석왕사 주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0세(1930)에 이르러 세상이 무상함을 절감하고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덕숭산 수덕사 만공 스님에게 건당(建幢)하여 춘성(春性)이란 법호를 받았다. 이때 받은 화두는 ‘萬法歸一一歸何處’로,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뜻이다.
1949년 김구 주석이 서거해 국민장을 엄수할 때 선두에서 목탁을 치며 장례 행렬을 인도했다고 전한다. 60세(1950)가 됐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북한산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도량을 지켰다. 1960년 의정부 망월사 주지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의 소임을 보며 후학을 지도했다. 거침없는 활구(活口)와 행동으로 대자유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15분 세수 87세, 법랍 74년으로 원적에 들었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서울 화계사에서 문도장으로 엄수됐다. 제자로 총림(叢林), 해월(海月), 견진(見眞), 설옹(雪翁), 향산(香山), 덕초(德草), 장진(莊眞), 무착(無着), 해룡(海龍), 무주(無住), 성초(性草) 스님이 있다. 비와 부도는 1981년 5월 성남 봉국사에 모셨으며, 비문은 탄허(呑虛) 스님이 찬(撰)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