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초월 동조 |
|---|---|
| 한자 | 初月東照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임제종, 영원사, 진관사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78년 |
| 입적 | 1944년 |
| 호 | 인영(寅榮), 초월(初月). 구국(龜國), 의수(義洙), 의고(義告), 최승(最勝), 자인(自忍), 인산(寅山) |
조선의 독립 염원하며 앞장선 수행자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부락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백하진(白河鎭), 모친은 김해 김씨이다. 속명은 백도수(白道洙). 어려서 경남 진주군(진주시) 정촌면 관봉리로 이사했다.
14세(1892)에 지리산 영원사에서 남파(南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지리산 영원사 『조실안록(祖室案錄)』에는 1903년 겨울부터 1904년까지 조실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07년 합천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겨 참선수행하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만해, 석전 스님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임제종(臨濟宗) 설립 운동을 전개했다.
1915년 조선불교선교양종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常置員) 총회에서 중앙학림(中央學林, 동국대 전신) 초대 강사로 위촉됐다. 계룡산 동학사(1929년 또는 1931년부터 3년간), 신촌 봉원사(1935년 3월 취임), 오대산 월정사(1930년대 2년간), 서울 진관사 마포포교당(1937년부터 수년간) 등에서 교학을 강의했다. 청주 용화사, 금강산 유점사, 부여 무량사, 밀양 표충사, 지리산 벽송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등에서도 주석했다.
1919년 3·1운동 후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를 결성하고 지하독립신문인 『혁신공보(革新公報)』와 『자유종(自由鐘)』 발간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19년 11월 25일(음력 10월 3일) 서울 종로에 태극기와 단군기념기를 게양했으며, 대한 승려 독립선언서 및 의용승군 사건으로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1939년 만주 봉천행 열차의 ‘대한독립만세’ 벽서(壁書) 사건 배후 인물로 연행되어 투옥됐다. 1943년 4월 출소했지만 재차 구금되어 대전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1944년 6월 29일 청주형무소에서 법랍 53년. 세수 67세로 입적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조영암의 『구국당 백초월 대선사 옥사 순국록』에는 스님에 대해 “항상 상기된 머리를 바른손으로 어루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키는 육척의 장신이요, 몸은 중후하였다. 옛말 그대로 헌헌 대장부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각종 매체에 스님의 글이 다수 전한다. 「지리산 화엄사 청하탄정(淸霞彈靜) 선사의 입멸과 단상」(1913년 3월 『조선불교월보』 14호), 「금파화상약전(琴巴和尙略傳)」(1916년 5월 『조선불교계』 1호), 「충청북도 청주군 사주면 용화사 창건기」(1915년 5월 『조선불교총보』 15호), 「불법중요(佛法中要)를 소개함」(1932년 2월 『금강산』 6호), 「금강저의 노래(1924년 7월 『금강저』 2호)」, 「계룡산동학사사적(事蹟)」(1929년) 등이다.
2009년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태극기와 『혁신공보』 등 독립운동 당시 사용한 자료가 다수 발견됐다. 태극기는 보물 제2142호로 지정됐다. 진관사 입구와 고성 고향에 비가 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