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응송 영희 |
|---|---|
| 한자 | 應松暎熙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대흥사, 다도, 초의, 전다수게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93년 |
| 입적 | 1990년 |
| 호 | 응송(應松), 일주(一舟), 매다옹(賣茶翁) |
| 탑소재지 | 김천 직지사 |
독립운동과 다도를 방편으로 정진한 수행자
1893년 1월 1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서망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박용권(朴鎔權), 모친은 함양 박씨이다. 어려서 이름은 포길(浦吉), 호는 일주(一舟), 매다옹(賣茶翁)이다. 중앙학림 재학 시에는 학규(學珪) 또는 영희(暎熙)를 사용했다.
어려서 백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17세에 군대 해산 명령에 불복해 완도로 유배 온 무관 출신 황준성을 스승으로 만났다. 1911년 1월 15일의 ‘대흥사 심적암 의병사건’에 ‘소년의병’으로 가담한 것을 계기로 해남 대흥사에서 인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인담 능오(印潭能悟)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원응 계정(圓應戒正, 1856∼1927) 스님 회상에서 사교과와 기신론 등 교학을 공부했다.
1914년 대흥사의 첫 공비(公費) 유학생으로 선발돼 경성으로 상경하여 중앙불전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 1920년 4월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는데, 부상을 당해 돌아왔다. 대흥사 장춘보통학교(1920~1926), 금일면 사립학교(1922), 소안면 사립학교(1924)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8년 다시 상경해 혜화전문에 진학해 공부했으며 1931년 졸업했다. 만해 스님의 비밀독립운동결사인 만당(卍黨)에 참여해 전라도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불교청년회(1930),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서기장(1930),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1931),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1936)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7년부터 해남 대흥사 주지를 지내고, 1938년에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로 선출됐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전국승려대회에서 불교중앙감찰원장으로 선출됐으며 1946년에는 동국대에서 인명학을 강의했다. 백범 김구와 교분이 있었으며 민주의원(民主議員)으로 선출됐다. 1946년 2월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준비위원 재정부원을 맡았다. 불교정화운동 이후 대흥사 주지를 사임하고 대흥사 산내 백화사에 주석하며 초의 선사의 다풍(茶風)을 계승해 한국 다도를 복원했다.
1982년에 지은 한시에는 불이(不二)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窓含映山紅(창함영산홍) 창엔 붉은 영산홍 꽃빛을 머금었고
白雲飛天末(백운비천말) 백운은 하늘가에 떠가네
松下一甌茶(송하일구다) 소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니
茶我同一體(다아동일체) 차와 내가 모두 한 몸이라.
1985년 박동춘에게 ‘전다수게’를 전해 다법을 잇도록 했다. 1990년 2월 광주 극락암에서 원적했다.1950년부터 1957년까지 저술한 『장보고전(傳)』을 2015년 1월 완도문화원에서 출간했다. 후학들이 2015년 자서전과 수연설법제법문(隨緣說法諸法門)을 묶어 『동다정통고』를 발간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