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원허 효선 |
|---|---|
| 한자 | 圓虛孝旋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표훈사, 불교정화, 선암사, 금강산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89년 |
| 입적 | 1966년 |
| 호 | 원허(圓虛) |
남북 사찰에 머물며 수행 전법에 매진한 스님
1889년 10월 경기도 안성군(안성시) 양성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崔氏). 어린 시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20세가 되던 해(1909) 금강산 표훈사에서 전관허(全貫虛)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행자생활 3년을 마치고, 1912년 2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한 후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안변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교학을 공부하고, 1935년 10월 금강산 표훈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주지로 있으면서 금강산불교회(金剛山佛敎會)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금강산(金剛山)』을 발간했다. 금강산불교회 고문(顧問)에는 만공(滿空), 종헌(宗憲), 경봉(鏡峯), 한영(漢永), 한암(寒巖) 스님 등 당대 고승 45명이 위촉됐다. 『금강산』 창간호에서 「서원의 말씀」을 통해 발간 취지를 밝혔는데, 일부 인용하면 이렇다. “머리털이 반백 되어 살날이 얼마 없는 오늘을 당해서 불교가 조선에 대한 것과 금강산으로서 조선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본즉 불교의 주인인 일분자(一分子)로서 또는 금강산의 주인인 일분자로서 내어놓을 것이 없을 만큼 한 것이 없고, 지은 것이 없음으로 뉘우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서 흐를 따름입니다.”
40년간 표훈사에 주석하며 주지까지 지냈지만 평생 원불(願佛)로 모신 불상과 승복 한 벌이 전부일 만큼 청빈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1년 부산으로 피난 와 선암사에 주석했다. 불교정화운동 때 비구측 5인 대표를 맡았다. 오대산 월정사, 고성 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양양 낙산사 등 강원도 사찰의 정화를 책임졌다. 1962년 4월 효봉 스님 등의 추천을 받아 불교재건비상종회 임시의장을 지냈다.
1962년 10월부터 서울 적조암 주지를 지냈으며, 1966년 12월 29일 오전 5시 30분 세수 78세, 법랍 60세로 원적에 들었다. 영결식은 1967년 1월 2일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 원허당 대선사 총무원장(葬)’으로 엄수됐다. 법구는 다비 후 적조암 근처에 뿌려졌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