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완호 낙연 |
|---|---|
| 한자 | 玩虎洛現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불화, 불모, 불화소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69년 |
| 입적 | 1933년 |
| 호 | 완호(玩虎), 정희(定熙) |
| 주요주석처 | 안변 석왕사, 양산 통도사 |
| 탑소재지 | 순천 송광사 |
조선 불화 전통 후대에 전한 금어
1869년 부산 동래(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202번지)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양낙현(梁洛現)으로, 출가 후 법명과 같다. 법호는 완호(玩虎)이다. 정희(定熙)라는 호도 사용했다.
범어사로 출가했지만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첫 작품이 1914년 2월 20일 쌍계사 통영포교당의 지장도, 신중도, 칠성도(3점) 등 5점이어서, 그 이전에 출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를 그리기 위해선 상당 기간 수련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자인 시찬(施讚, 1899~?) 스님이 “1914년 4월 8일 양산군 통도사에서 완호 낙현 선사에게 축발(祝髮)하고”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상좌를 둘 정도면 이미 오래전에 출가한 것이 분명하다. 단청기능보유자 월주 덕문 스님에 대한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양완호는 1890년 궁중 도화서 화원이 주관했던 합천 해인사 불사에 관련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90년이면 21세로, 이보다 앞선 10대 무렵에 불화 공부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1920년 수석화사(首席畵師)로 양산 통도사 사명암 현왕도와 지장보살도를 그렸다. 이 해 동안거 때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정진했는데, 방함록에는 헌식(獻食) 소임을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21년 부산 영도 복천암에 불화소(佛畵所)를 세우고 불화 조성과 제자 양성을 겸했다.
1921년 옥련암 독성도, 1931년 선산 도리사 영산회상도와 신중도를 제작했다. 그 밖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제작 연도)
통영 용화사 괘불도(1914), 범어사 안양암 칠성도, 독성도(1914), 경주 불국사 신장도(1917), 신중도(1930), 통도사 사명암 석가후불도(1917), 지장도(1920), 울산 고석사 지장보살좌상(1919), 서울 동명불원 관음보살좌상(1919), 통도사 자장암(1920), 울릉군 대원사(1920), 경주 기림사 독성도·산신도·조왕도·지장보살좌상(1921), 부산 복천사 석가후불도·현왕도·조왕도(1921), 보현보살좌상(1922), 범어사 계명암 석가후불도(1927).
부산 영도구청 자료에는 입적 연도가 1933년으로 되어 있다. 둘째 아들 양정욱은 1929년 ‘동래 흑조회(黑潮會)’ 사건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순국(22세)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경봉(鏡峰) 스님은 “완호 불모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대불모.”라면서 “선사이며 불보살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경허 스님 법맥을 이은 혜월 스님 법제자인 운봉(雲峰) 스님의 『운봉선사법어집』에는 「吊玩虎和尙(조완호화상)」이 실려 있다.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완호 화상의 부고를 받고 아이고, 아이고. 완호 스님이여! 애달프고 애달프도다. 칠십여 년을 사바세계에 노니시며 불모가 되시어 무량공덕을 이룩하셨고, 본색을 감추고 세속과 함께하되 어느 곳에서나 걸림이 없었도다. 애달프고 애달프도다! 화상의 최후여 피부가 탈락하니 진체(眞體)가 눈앞에 나타남이라. 돌호랑이가 불 속에서 잠을 자고 진흙소가 바다 위를 달리는구나. 화상은 어디로 돌아가셨나요! 애달프다! 해 지는 바닷가의 노을은 곱고 푸른 파도 물결 위의 돛단배 외롭구나.
화맥(畵脈)은 보응(普應), 정윤(定潤), 남곡(南谷), 시찬(施贊), 월주(月洲), 정도(貞道), 춘화(春化), 일섭(日燮), 송파(松坡), 중근(重根) 등으로 이어졌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