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신상완 |
|---|---|
| 한자 | 申尙玩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독립운동, 용주사, 상해임시정부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91년 |
| 입적 | 1951년 |
| 주요주석처 | 양산 통도사, 부산 복천사 |
독립운동 전개한 불교계 대표 인물
1891년 1월에 태어났다. 출가 이전 이력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14년부터 수원 용주사 관련 스님으로 등장한다. 은사는 강대련(姜大蓮)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국청사 주지를 지내고 1917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영장사, 천왕사, 나한사 주지를 겸임했다. 이들 사찰은 북한 지역이지만 수원 용주사 말사였으며, 후에 보현사 말사로 변경됐다.
1917년 봄 수원 용주사 법계(法階) 시험에서 중덕(中德)으로 선발되고 중앙학림(현 동국대)에 입학했다. 만해 스님 영향을 받아 유심회(唯心會) 회장으로 활약했다. 유심회는 불교연구, 민족사상 고취, 불교 대중화를 지향했다.
1919년 2월 28일 저녁, 만해 스님에게 기미독립선언서의 경성 시내 배포 밀명을 받았다. 이후 서울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에서 불교계 총궐기를 위한 긴급회의를 열고, 전국불교도독립운동총참모본부를 결성해 총참모를 맡았다. 1919년 3월 1일 중앙학림 학생들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를 피해 3월 7일 상해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 뒤 조선으로 돌아와 백초월 스님 등과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비밀리에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명의의 ‘불령승려검거(不逞僧侶檢擧)’ 자료에는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화산면 용주사, 경성부 인사동 105번지 신복성방(申福成方) 체포, 나이는 30세’로 기록돼 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한일관계사료집』에 ‘금강산 승려 신상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이 한국불교에 대 압박」이란 글이 게재돼 있다. 대한승려의 세력, 서산대사와 승려의 애국열, 독립에 대한 승려의 각오, 왜승(倭僧)의 야심 실패, 불교를 농활(弄活)코저 하는 총독의 간책(奸策), 매국당과 총독부의 암중 활약, 주지선거의 구속과 간섭, 사찰계급과 본말사의 관계, 사찰령 등의 순서로 기술했다.
1919년 11월 15일 일제에 항거하는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大韓僧侶聯合會 宣言書)’ 발표를 주도했다. 이보다 하루 앞선 11월 14일 여운형, 최근우(崔謹愚)와 동경으로 떠나, 일본 각지를 방문하고 12월 10일 중국 상해로 돌아왔다. 1920년 ‘임시의용승군 헌제(臨時義勇僧軍 憲制)’를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1920년 3월 15일자 기밀 제42호, 「重ナル排日派鮮人ノ略歷送付ノ件」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경기도의 승려로 불교상(佛敎上)의 수양도 상당히 지니고 있고, 승려계(僧侶界)에는 세력이 있어 그 대표자로서 상해에 왔다. 항상 조선의 승복을 입고 다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잠입해 불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지만 1920년 4월 6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경성감옥에 구금됐다 1923년 5월 석방됐다. 1923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불교 당국 제씨(諸氏)에게」라는 기고문을 3차례 발표했다. 1942년 4월 용주사 주지 선거에 후보자로 거론된 것 외에는 그후 활동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칩거하며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1월 입적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