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대련 덕문 |
|---|---|
| 한자 | 大蓮德文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만일염불회, 강주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87년 |
| 입적 | 1949년 |
| 호 | 대련(大蓮) |
| 주요주석처 | 서울 법륜사, 금강산 유점사, |
| 탑소재지 | 북한산 태고사, 서울 법륜사 |
출재가와 함께 대중불교 건설에 진력
1887년 9월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대련(李大蓮)이다. 1897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응화(應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 덕문(德文)이란 법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24년 석전 스님이 글을 쓴 만화 관준(萬化寬俊, 1850~1918) 스님 비명에는 법은손(法恩孫)의 제일 앞에 있다.
출가 후 금강산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하고, 1912년 대교과를 마친 후 참선 수행을 위해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겼다. 순천 송광사 선원(1914)과 해인사에서 정진한 후 건봉사로 돌아왔다.
1917년부터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1924년에 금강산 유점사 총림 율사(律師)로 추대됐다. 1928년 건봉사 주지 당시 만해 스님이 편찬해 발간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 서문에 “조선 사찰은 역사의 불완전이라고 하느니보다 실로 역사가 없는 것이다.”라면서 “사찰의 역사는 불교 역사의 대부분이 될 것인즉 사찰 역사의 결함은 곧 불교 역사의 결함이다.”라고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9년 1월 한암, 만암 스님 등이 참여한 조선불교승려대회를 주도하고, 교정(敎正)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에 선임됐다.
건봉사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회주(1932), 건봉사 개성포교당 포교사(1934), 원산 석왕사 포교사(1936)로 부임했다. 원산 석왕사 포교당에 선회(禪會)를 만들어 참선을 지도하고, 불교신도단(佛敎信徒團)을 조직했다. 1936년 퇴경 스님(권상노)이 지은 ‘(건봉사)법우경원설립비(法雨經院設立碑)’에는 산중노덕(山中老德) 21명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1937년 건봉사 백화암에서 법화회상(法華會上)을 열고 강주(講主)를 지냈다.
『금강산사적』에 의하면 14년간 건봉사 주지(1919년 11월~1923년 10월, 1926년 10월~1936년 4월 18일)를 지냈다. 각황사(지금의 서울 조계사) 창건 당시 건축기성회(建築期成會) 통상위원(通常委員)에 위촉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 금강산에 머물렀는데, 당시 불교신보(佛敎新報)에는 “삼팔 이북 불교총무원 위원장 원보산 화상의 사임으로 인하여 그 후임에 이대련 화상이 피선(被選)되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취임하지 아니하시고 계시다고 한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1949년 2월 12일(음력)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서 세수 62세, 법랍 52세로 원적에 들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