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남전 한규 |
|---|---|
| 한자 | 南泉翰奎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선학원, 범어사, 만해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68년 |
| 입적 | 1936년 |
| 호 | 우두산인(牛頭山人), 백악산인(白岳山人) |
| 주요주석처 | 건봉사, 원산 석왕사포교당 |
선학원 창건 주도하여 조선불교 수호 앞장
1868년 9월 6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병용(金炳鎔), 본관은 안동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 자호(自號)는 우두산인(牛頭山人), 백악산인(白岳山人)이다.
출가 전에 12년간 서송재(徐松齋) 선생에게 『사략』, 『통감』 『고문』 『맹자』 등 한학을 공부했다. 16세에 최치원 유적을 보기 위해 해인사를 찾았다, 신해(信海)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며 정진하다, 1885년 4월 15일 수계를 받고 완허 장섭(玩虛仗涉)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혼해(混海), 회응(晦應) 강백 회상에서 교학을 배웠다.
1904년 해인사 총섭에 취임하고, 1908년 2월 14일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제산(霽山) 스님에게 구족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참선수행에 매진했지만 “우리 본마음은 모두 부처님이며, 경전을 이정표 삼아 부처님 경지에 가야 한다.”라고 교학 연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쉽고 재미있는 법문으로 대중을 감화시켰으며, 명필가와 대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해인총림 해인사 법보전 기둥의 주련인 ‘圓覺道場何處(원각도량하처)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는 1908년 남전 스님이 쓴 것이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도량은 어느 곳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다.”라는 의미이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후에는 민족혼을 되살리고, 조선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1911년 4월 범어사 동래포교사, 1913년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소임을 맡았으며, 1921년 조선불교선학원본부 설립을 주도했다. 1922년 조선불교 왜색화(倭色化)의 주모자로 젊은 승려들에게 명고축출(鳴鼓逐出)을 당한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꾸짖는 할(喝)을 했다. 민족대표 33인인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일본 경찰에게 삼엄한 감시를 받을 때 선학원의 방을 흔쾌히 내주었으며, 1923년 범어사 사적비를 세웠다.
1924년 직지사 조실을 지내고, 1934년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확대될 때 초대 이사를 맡았으며, 통도사 보광전에서 정진했다. 10여 년간 모은 돈으로 불양답(佛糧畓) 50두락을 구입해 해인사에, 철원군 금화(金化)와 화천 금성(金城)의 100여 두락의 전답은 선학원에 각각 기증했다. 『경허집(鏡虛集)』의 표제를 썼다.
1936년 4월 28일 서울 선학원에서 세수 69세,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로 보봉 준표(寶峰俊杓), 석주 정일(昔株正一), 일부(一夫) 스님을 두었다. 후학들이 『남전선사문집(南泉禪師文集)(1978)』, 『남전법묵(南泉法墨)』을 펴냈다. 금정총림 범어사에 비가, 서울 칠보사에 진영이 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