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김영수 |
|---|---|
| 한자 | 金映遂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영은사, 구산선문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84년 |
| 입적 | 1967년 |
| 호 | 포광(包光), 두류산인(頭流山人), 연실(然室) |
| 비소재지 | 부산 범어사 |
근현대 한국불교학 정립한 강사
1884년 6월 29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양지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상용(金相用), 모친은 충주 석씨(石氏). 본관은 김해. 어려서 이름은 창진(昌辰)이고, 족보에는 용수(容修)라 기록돼 있다. 법명은 영수(映遂), 호는 포광(包光), 두류산인(頭流山人), 당호는 연실(然室)이다.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화적(火賊)에게 마을이 불타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1892년(9세)부터 서당에서 『통감』과 사서삼경 등 한학을 수학했다. 1895년(12세) 4월에 지리산(함양) 영원사로 출가하여, 12월 8일 환명정극(煥明正極)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896년(13세) 5월부터 강원에서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등을 배우며 교학을 연찬했는데 명석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서장』, 『도서』(1899), 『능엄경』, 『기신론』(1900), 『반야경』, 『원각경』, 『원각경서현담』, 『화엄경』(1901), 『화엄경현담』(1903), 『선문염송』(1904)을 수학했다. 이 시기에 영은사, 해인사, 범어사, 영은사 등에서 석월(石月), 재룡(在龍), 진응(震應), 서응(瑞應), 재봉(齋峰), 혼해(混海) 스님 등 당대 강백들의 회상에서 강원 이력(履歷)을 마쳤다.
1906년 1월 건당식을 갖고 환명 정극 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후 영원사 강주(講主)로 후학을 지도했다. 남원 실상사 주지(1913), 보은 법주사 주지(1916)를 거쳐 서울불교중앙학교 교수(1918)로 초빙됐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귀국했는데, 김법린(1899~1964) 박사는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중순인가, 김포광 강백을 (상해임시정부에) 밀파하였다. 수원(隨員)으로 김상헌(金祥憲) 씨가 동행하였다. 제산(諸山)의 기덕 첨위(耆德僉位, 대덕고승)는 (김포광) 대표 파견과 운동자금의 조달에 갸륵한 숨은 정성을 다하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1920년 함양 법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23년(40세)에 결혼했지만 승적은 유지했다. 1928년(45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1940년(57세) 퇴임했다. 이후 순천 선암사 주지와 전북불교연합강당의 강주를 지냈다. 1938년 『진단학보』에 「조계선종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념을 정립됐다.
1948년(65세) 12월 동국대 초대 학장으로 취임해 1950년 4월까지 봉직했다. 이후 원광대, 전북대, 전북연합대(전시)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74세) 원광대 한국불교문제연구소장으로 취임하고, 1961년(78세에) 전북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80세) 동국대 명예교수로 위촉됐으며, 1967년 1월 10일 세수 84세로 입적했다. 경남 함양군 송전리 문수동에 탑이 있다.
『신불교』와 『진단학보』 등에 「오교양종에 대하여」(1937), 「조선불교 종지에 대하여」(1937), 「조계선종에 대하여」(1938), 「조계종과 전등통규(傳燈通規)」(1942~1943), 「태고화상의 종풍(宗風)에 대하여」(1942), 「종조(宗祖) 종명(宗名)의 질의에 대하여」 등의 글을 발표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