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응운 공여 |
|---|---|
| 한자 | 應雲空如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용암 혜언, 응운공여대사유망록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94년(정조 18) |
| 입적 | 1835년(헌종 1) 이후 |
| 호 | 공여(空如), 응운(應雲), 전유(展有), 인전(仁全, 仁專) |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승려로서 『응운공여대사유망록』의 저자
19세기 승려로서 해인사 용암 혜언(龍岩慧彦, 1783~1841)의 제자이며, 스승의 전기 「용암전(龍岩傳)」을 남긴 인물이다.
법명은 인전(仁全)이고, 법호는 공여(空如)로 보이나, 대사의 저서 『응운공여대사유망록(應雲空如大師遺忘錄)』에 필사된 제명에 따라 ‘응운 공여’ 대사로 불린다.
1794년에 태어나 15세에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이 방황하다가 1813년(20세) 10월에 해인사로 출가하였다. 이에 앞서 1812년 가을에는 조계산에 있다가 가야산에서 열린 용암 혜언의 무차대회(無遮大會)에 참석하였고, 용암대사에게 선학을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814년(21세)에는 서명사(西明寺)에서 지냈는데 삼남 지방에 흉년이 심하게 들어 해서로 갔다가 관동으로 향하는 등 이천 리를 행각하였다. 강원도 평강군 백련암에서 겨울을 나고 금강산 유점사·오대산·태백산 등 만 리 길을 돌아다니고 돌아왔으며, 황폐해진 고향 마을을 지나 조계산에 들어갔다.
1816~1817년(23, 24세)에는 호남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1818년(25세) 3월에는 용암대사가 선유(善宥)와 함께 지리산에서 교학을 익히도록 했다. 1826년(33세) 3월 20일 강원도 관찰사를 만났고, 가을에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후 김조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6년간 교분을 나누었다. 김조순은 정조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순조의 장인이 되었으며, 문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공여라는 호는 김조순에게 받은 것이다.
1827년(34세) 여름에는 북쪽으로 향하여 함흥 낙민루(樂民樓)에 오르는 등 관서 지방을 두루 다녔고, 묘향산 보현사를 거쳐 가을에 구월산에 들어갔으나 특별한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한양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하고 영남 땅을 밟았다. 그곳에서는 밀양 수령이 불러 주었고, 재약산(표충사) 화엄법회에 참여하였는데, 50인의 승려가 함께 염불하고 독송하는 감동을 맛보았다. 1835년, 42세에는 용암대사의 명으로 가야산에 들어가 『화엄론』을 간행하였다.
대사의 계보는 부용 영관(芙蓉靈觀)―청허 휴정(淸虛休靜)―편양 언기(鞭羊彦機)―풍담 의심(楓潭義諶)―월담 설제(月潭雪霽)―환성 지안(喚醒志安)―호암 체정(虎岩體淨)―청봉 거안(靑峰巨岸)―율봉 청고(栗峰靑杲)―경허 법첨(鏡虛法添)―용암 혜언(龍岩慧彦)―응운 공여로 이어진다.
대사가 남긴 유일한 저서는 『응운공여대사유망록』이다. 발행 사항을 알 수 없는 필사본으로, 산문 89편이 실려 있다.
대사는 19세기 중엽 용암 혜언의 제자로, 스승의 전기를 충실하게 작성하는 등 당대 문화의 복원에 기여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유불선 삼교일치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도교적 논리와 풍수지리설 등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한 특징이 있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