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용암 체조 |
|---|---|
| 한자 | 龍巖體照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용암당유고, 대원 무외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13년(숙종 39) |
| 입적 | 1779년(정조 3) |
| 호 | 용암(龍巖) |
| 주요 주석처 | 파계사 |
18세기 설악산 신흥사에 주석하며 『용암당유고』를 남긴 승려
18세기에 설악산 신흥사에 주석하며 맑은 시심을 담은 시 79편 등을 수록한 『용암당유고(龍巖堂遺稿)』를 남긴 승려이다.
법명은 체조(體照)이며, 법호는 용암(龍巖).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정(鄭)씨다. 선비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사기』와 외전을 다 읽고 문장과 시에 능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1725년(13세, 영조 1) 집안에 병고가 있어 어머니를 잃고 연이어 아버지를 여의었다. 형과 함께 집을 떠났는데, 형은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고, 대사는 서울 근처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설악산의 석임장로(釋稔長老)를 만나 함께 설악산에 들어갔다. 장로는 그에게 학업을 익히게 하고, 선문(禪門)의 요체를 가르쳤다.
1730년(18세, 영조 6)에 석임장로를 은사로 삼아 머리를 깎고, 백련당(白蓮堂) 지임대사(智稔大師)를 계사(戒師)로 삼았다. 이때부터 일암법사(日庵法師)의 강석에서 불경은 물론 외전까지 힘써 배웠다. 오묘한 이해와 심오한 관법이 동기 중에 뛰어나 일암의 인가를 받았다.
이후 표연히 한 벌의 가사로 남북의 여러 종파를 두루 참방하고 깊은 깨달음을 얻은 후 1745년(33세, 영조 21)에 신흥사로 돌아왔다. 석장을 집고 불자를 잡아 문도들이 다수 모이자 스승인 일암은 거처하던 내원암(內院庵)을 대사에게 맡기고 용암(龍巖)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대사는 일암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7세손이 된다.
대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중을 대하였고, 신흥사의 여러 불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1779년(정조 3) 12월 21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67세, 법랍은 51년이다. 입적 후 부도를 절의 동쪽에 봉안하고 ‘용암탑’이라 새겼다.
시 79편과 기(記) 3편, 잡저(雜著) 1편의 문집 『용암당유고』에는 시를 즐겼던 대사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시 작품에는 사시사철 변하는 설악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승려의 삶, 그리고 청담을 나누는 여러 선사, 설악산에 찾아온 지방 관리와의 만남에서 얻게 되는 느낌과 생각이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문(記文)은 설악산 신흥사의 중창불사와 관련된 짧은 발원문이다.
대사는 18세기 후반 설악산 신흥사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동시대에 법 형제인 대원 무외(大圓無畏, 1714~1791)는 『대원집(大圓集)』을 남겼다. 이들은 설악산 신흥사의 불사(佛事) 현황과 문화를 파악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 집필자 : 김종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