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오암 의민 |
|---|---|
| 한자 | 鰲巖毅旻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오암집, 보경사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10년(숙종 36) |
| 입적 | 1792년(정조 16) |
| 호 | 오암(鰲巖) |
18세기에 포항 보경사에 주석하며 문집 『오암집』을 남긴 승려
18세기에 포항 내연산(內延山)의 보경사(寶鏡寺)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입적한 승려로서, 수행의 일상에서 느낀 정서를 잔잔하게 읊은 시, 사대부와 주고받은 편지, 인근 사찰의 중창기를 수록한 문집 『오암집(鰲巖集)』을 남겼다.
법명은 의민(毅旻), 법호는 오암(鰲巖)이다. 속성은 김(金)씨, 본관은 김해. 조부는 남해 현감을 지낸 김석경(金錫慶), 부친은 김준(金浚)이며, 어머니는 권(權)씨다. 1710년(숙종 36) 포항 청하면(淸河面)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났다. 대사의 호가 오암(鰲巖)인 것은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려서 총명하여 이상사(李上舍)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 지역의 선비에게 유교 경전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1731년(영조 7)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 흉년이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듬해 1732년(영조 8) 친척이 되는 승려[戚僧]에 기대 보경사에 입산하여 각신장로(覺信長老)에게 머리를 깎았다. 은사의 도움으로 생활을 유지하며 계영선사(桂影禪師) 문하에서 불경을 공부하며 구족계를 받았다. 3년 후인 1737년(영조 13)에 선사(先師)가 입적하자 3년간의 심상(心喪)을 마치고 탑을 세운 후 남쪽으로 행각을 떠났다.
목로(牧老)의 모임에 참여하였는데, 경을 읽는 도반 중에서도 뛰어나 목로도 대사를 아꼈다고 한다. 여러 곳을 참방하며 4년을 보내다가 옛 절로 다시 돌아왔는데, 여기에는 속가의 부친을 모시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1741년(영조 17) 주지가 되어 영남의 종장(宗匠)으로 기림을 받았다. 정혜(定慧)를 부지런히 닦아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속가의 부친을 마음으로나 경제적으로 봉양하는 데 전력했으며, 자신은 솔잎차 두 잔으로 하루를 지낼 정도로 검소하였다. 호로(虎老) 스님이 추풍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통도사의 대회에 참여하여 넉 달을 보내고 돌아왔고, 팔공산 은해사 운부암(雲浮庵)의 쌍운장로(雙運長老)를 참방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1753년 초가을에 은사가 입적하고, 1754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대사는 상을 치른 이후에도 내연산을 떠나지 않았다. 이는 효행을 다한 행위라 평가되었다.
1792년 중양절 이틀 전에 입적하였다. 세수 83세요, 법랍 61년이다. 현재 보경사에 진영이 남아 있고, 탑은 보경사 서운암에 있다.
저서로는 문집 『오암집』이 있다. 보경사에서 1792년(정조 16) 제자 회관(誨寬)이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서문을 받아 간행한 목판본이다. 문집에는 수행 과정에서 느낀 다양한 시상을 담은 281수의 시와 함께 「옥련암중창기(玉蓮庵重創記)」, 「주종문(鑄鐘文)」, 「천왕문중창상량문(天王門重創上樑文)」 등의 기문이 있다.
대사는 18세기 포항 내연산 보경사에 주석하며 유자들과 교분을 나눈 시와 편지, 중창불사의 기록을 남겨, 당시 보경사 중심의 불교문화를 충실히 기록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 집필자 : 김종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