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효봉 학눌 |
|---|---|
| 한자 | 曉峰學訥 |
| 유형 | 인물 |
| 시대 | 근현대 |
| 출생 | 1888년 5월 28일 |
| 입적 | 1966년 10월 15일 |
| 호 | 효봉(曉峰) |
| 주요주석처 | 안동 광흥사, 예천 용문사 |
세속 영화 버리고 수행한 고승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늦게 출가하여 오롯이 수행에 전념한 고승이다.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에서 이병억(李炳億)과 모친 김씨의 5형제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13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지방법원, 함흥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에서 법관으로 근무했다. 1923년 첫 사형을 선고한 후 “내가 갈 길은 따로 있다.”라며 스승을 찾아 나섰다.
1925년 36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늦게 출가했다. 법명은 원명(元明). 1930년 늦은 봄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어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라는 서원을 세우고 용맹정진했다. 45세(1932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설악산 봉정암·오대산 상원사 등 선원에서 정진하고, 1937년 순천 송광사에 주석하며 납자들을 맞이했다.
1945년 8.15광복 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되고, 한국전쟁 당시 통영 미래사에 주석했다. 조계종 종정(宗正)도 역임했다. 불교정화 당시 “大厦將崩 衆力扶持”라는 내용의 ‘불교정화불사 송(頌)’을 지어 격려했다. “큰 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라는 뜻이다.
대구 동화사와 밀양 표충사에서 주석하며 후학을 인도하고,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표충사 서래각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9세, 법랍 42년.
· 집필자 : 이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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