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홍월초 |
|---|---|
| 한자 | 月初巨淵 |
| 유형 | 인물 |
| 시대 | 근대 |
| 출생 | 1858년 |
| 입적 | 1934년 |
| 호 | 월초(月初) |
| 주요 주석처 | 순천 송광사, 통영 용화사, 통영 미래사, 밀양 표충사, 대구 동화사 |
| 비 소재지 | 순천 송광사, 통영 용화사, 통영 미래사, 밀양 표충사 |
봉선사 주지 역임하며 근대 교육 주창한 고승
수국사(守國寺)를 창건하고 봉선사 주지를 역임하며 근대 교육을 주창한 고승이다.
1858년 6월 12일 한성 니동(泥洞,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부친 홍병옥(洪秉玉)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양주군(남양주군) 봉인사 부도암에서 환옹 환진(幻翁喚眞) 스님에게 득도하고 법을 이었다. 백파 긍선(白坡亘璇) 스님의 법증손(法曾孫)이다. 이후 15년간 교학을 연찬하는 동시에 선원에서 정진했다. 35세 되던 1892년 남한산성팔도도총섭(南漢山城八道都總攝)에 취임했다. 1900년 고종의 명에 의해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서울 은평구)에 수국사를 창건하고, 토지 8만 2645㎡(2만 5000여 평)를 사찰 정재로 만들었다.
1902년 서울 동대문 밖에 새로 건립한 원흥사(元興寺) 내산섭리(內山攝理)가 됐다. 원흥사가 1904년 문을 닫게 되자 전각 일부와 불상, 불화 등 불구(佛具)를 봉선사로 옮겼다. 1905년 2월 궁내부(宮內府) 명으로 양산 통도사 원장, 3월 장예원(掌禮院) 명으로 법주사 원장, 10월 궁내부 봉선사 교종판사(敎宗判事)에 취임했다.
1906년 군부(軍部) 명으로 북한산성국내십삼도도총섭(北漢山城國內十三道都總攝) 소임을 맡았다. 한일 강제병합 후 1913년 4월, 1916년 5월, 1919년 6월, 1922년 10월, 1926년 4월 봉선사 주지를 다섯 차례 역임했다.
원흥사 관리서(管理署)가 폐지됨에 따라 봉원사 이보담(李寶潭) 스님(명진학교 초대 교장)과 조선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원흥사에 본부를, 지방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1906년 불교연구회가 주도해 원흥사 자리에 설립한 명진학교(지금의 동국대)의 제2대 교장을 맡아 인재 양성에 나섰다. 1922년 양주 회암사 대웅전과 3화상(지공·나옹·무학) 영각(影閣)을 새로 지었다. 1926년 봉선사 대웅전을 중수(重修)하고, 삼성각을 새로 지었다. 안진호에게 『봉선본말사지』를 편찬하게 하였다.
1929년 봉선사에서 선회(禪會)를 개최했다. 73세에 봉선사 주지를 사퇴하고 애월재(愛月齋)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 1934년 토지 등 모든 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하고, “선강교육(禪講敎育)을 기본으로 삼으라.”라는 유촉을 남긴 채 원적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63년.
2023년 6월 17일 오전 수국사 월초당에서 ‘월초 거연 대화상 89주기 다례재’가 봉행됐으며, 다례재에 앞서 경내로 이운된 ‘삼각산 수국사 사적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 집필자 : 이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