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석주 정일 |
|---|---|
| 한자 | 昔珠正一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불교혁신, 종단개혁, 어린이포교, 선학원 |
| 시대 | 근현대 |
| 출생 | 1909년 3월 4일 |
| 입적 | 2004년 11월 14일 |
| 호 | 석주(昔珠) |
| 주요주석처 | 서울 도선사, 고성 옥천사, 서울 선학원 |
| 비소재지 | 서울 도선사, 고성 옥천사 |
불교혁신과 종단개혁에 이바지한 고승
20세기에 활동하며 불교혁신과 종단개혁에 이바지한 고승이다.
1909년 3월 4일 경북 안동군(안동시) 북후면 옹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강계술(姜啓述). 어려서 마을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22년 상경해 가회동의 9촌 아저씨(강두희) 필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923년 선학원에서 남전(南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6년간 행자 생활을 하면서 석두(石頭)·도봉(道峰)·만해(萬海) 스님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 2월 1일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정일(正一). 사미계사는 오이산(吳梨山) 스님. 1933년 3월 18일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고 상경하여 선학원에서 남전 스님에게 석주(昔珠)라는 법호를 받았다.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안거를 하고 선학원으로 돌아왔는데, 1936년 4월 28일 은사가 입적해 금강산 마하연·묘향산 보현사·덕숭산 정혜사 등 선원에서 정진했다.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1940)을 지내고 1941년에는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상경하여 선학원에서 조명기, 정두석, 백석기, 장상봉, 곽서순, 김경봉 스님 등과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했다. 1954년 8월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석하며 불교정화운동에 나섰다.
비구승 측 종회의원과 교육위원을 지내고 불국사 주지(1958),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1961~1964), 동국대 이사(1962), 서울 칠보사 주지(1965), 동국역경원 부원장(1965), 은해사 주지(1976), 중앙승가대 학장(1979), 서울 칠보사 조실(1983), 관음사 주지(1985)를 역임했다.
조계종 총무원장(1971, 1978, 1984), 조계종 포교원장(1977),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1979), 비상종단 운영회의 부의장(1983), 동국역경원 이사장(1990),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1994), 서울 봉은사 조실을 지냈다. 제2회 포교대상(1989)을 수상했다.
어린이 포교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65년 칠보사어린이회를 창립하고, 어린이합창무용단과 어린이합주단을 만들었으며,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1970)를 역임했다.
노년에는 아산 보문사에 안양원을 세워 노인 복지활동에도 힘썼다. 2004년 11월 14일 오후 6시 충남 아산에서 입적했다. 세수 95세, 법랍 81년. 영결식은 11월 18일 부산 범어사에서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됐다. 아산 보문사에 ‘석주대종사기념관’이 있다. 한국불교아동문학회는 2008년 10월 보문사에 ‘어린이 사랑 석주큰스님 추모비’를 건립했다.
· 집필자 : 이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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