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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한글김법린
한자金法麟
유형인물
키워드중앙불전, 만당(卍黨)
시대근현대
출생1899년
입적1964년
주요 주석처범어사, 해인사, 은해사
탑 소재지범어사
근대불교 승려의 대표적 지성 가운데 한 사람
민족의 독립운동과 불교의 혁신운동에 평생을 바쳤으며, 때로는 정치에 참여한 승려이며 학자이고 정치가이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이름은 철아(鐵啞)이고, 법명은 범산(梵山)이다. 1914년 은해사에서 출가하여 범어사의 명정학교를 마친 후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새로운 학문을 익히기 위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1918년 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학교)으로 편입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범어사로 내려가 3월 18일 부산 동래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 이후 경찰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불교 학교인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에 프랑스로 건너간 후 1926년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서구의 자유사상을 연구하였다. 1928년에 백성욱, 김상호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에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1930년에는 한용운의 뜻을 이어 ‘만당(卍黨)’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자와대학에서 불교를 연구하였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해인사·범어사 등에서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1938년 진주에서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당시 미군정 하지 장관을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도록 협의하였다. 1952년에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편 제3대 민의원으로 활약하고 1959년 초대 원자력원장을 맡는 등 정치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인재 양성과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이다가 다음 해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5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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