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기허 영규 |
|---|---|
| 한자 | 騎虛靈圭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휴정, 유정, 의승 |
| 시대 | 조선 중기 |
| 출생 | 미상 |
| 입적 | 1592년(선조 25) |
| 호 | 기허(騎虛) |
| 시호 | 의선(毅禪) |
| 탑소재지 | 경주 금곡사(金谷寺) |
조선 중기의 고승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수복에 공헌한 의승장(義僧將)이다.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속성은 밀양 박씨(朴氏)이다. 호는 기허(騎虛)이다.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출가하고, 뒤에 휴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말수가 적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공부 진척 속도가 빨랐다. 영변 묘향산에서 휴정에게 가 수학했기 때문에 사명과는 동문이 된다. 그는 휴정 문하에서 여러 범어 경전과 불경 외에 여러 서적을 20여 년 공부하였다. 법호를 기허당(騎虛堂)이라 하였다.
공주에 소재하는 청련암(靑蓮庵)에 있으면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 익히기를 즐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규합하여 관군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지만, 그가 이끄는 승병은 끝까지 싸워 마침내 1592년 8월 초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성 탈환은 조헌(趙憲, 1544~1592)의 의병, 영규(靈圭)의 승병,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의 관군이 연합하여 이뤄낸 전과였다.
의병장 조헌이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군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를 공격하고자 할 때,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하여 이를 늦추자고 하였지만 조헌이 듣지 않자, 패전을 예감하면서도 조헌을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 하여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가 거느린 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의 호남 침공을 저지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는 청주성의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지만, 영규는 임금이 내린 상이 도착하기 전에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남쪽 진락산(進樂山) 기슭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眞影閣)과 비를 세웠다. 그 후 200 년이 지난 후에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이 진영각을 금산 남쪽의 진락산 기슭에 세우고 그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나라에서 ‘의선(毅禪)’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선조가 그의 유해를 계룡산 아래의 서산(栖山)에 매장했으며, 그 곁에 충절비각을 세워 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과 가을로 제사 지냈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