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백파 긍선 |
|---|---|
| 한자 | 白坡亘璇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선문수경, 작법귀감, 설두 유형, 김정희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67년(영조 43) |
| 입적 | 1852년(철종 3) |
| 호 | 백파(白坡), 구산(龜山) |
| 탑 소재지 | 쌍계사 |
조선 후기 선교(禪敎)를 겸수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승려
조선 후기에 화엄 교학, 간화 참선, 정토염불과 의식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을 남긴 승려이다.
전라도 무장(茂長: 고창) 출신으로 속성은 이씨, 본관은 전주다. 1783년(정조 7) 과거 공부를 위해 고창 선운사에서 시헌(詩憲) 장로에게 유가의 경서를 배우던 중 『치문(緇門)』을 보고 발심하여 시헌 장로를 은사로 하여 1784년(정조 8) 8월 출가하고, 얼마 후 다시 시헌 장로의 사부인 연곡(蓮谷) 화상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1790년(정조 14)에는 함양 영원사(靈源寺)에서 화엄 종장인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게 구족계를 받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열람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설파 강백의 임종을 지켰다. 26세 때인 1792년(정조 16) 백양사 운문암 조실로 초청되어 49세까지 약 24년간 화엄 강석에서 교학상장의 공을 쌓았다. 30세 때 설봉 거일(雪峰巨日)에게 입실 건당하니, 태고의 제15세이며, 세존의 제72세이다.
1815년(순조 15)부터 내장산 용문암에서 정·혜(定慧)를 7년 동안 함께 닦았고, 1821년(순조 21)에는 금강산과 오대산을 순례하였다. 1822년(순조 22)에 다시 백양사 운문암으로 돌아와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조직하고 19조에 달하는 『수선결사문과석(修禪結社文科釋)』을 지었다. 이후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1824), 『선문오종강요사기(禪門五宗綱要私記)』(1824), 『대승기신론필삭기(大乘起信論筆削記)』(1825), 『작법귀감(作法龜鑑)』(1826) 등을 펴냈다.
1830년(순조 30)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 옛터의 화장대에 소림굴을 지어 학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선교를 겸수하면서, 『선문수경(禪門手鏡)』(1832), 『금강팔해경(金剛八解鏡)』(1833), 『선요사기(禪要私記)』(1839)를 저술하였다. 『선문수경』은 발표 이후 근대까지 선사들 간에 활발한 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840년(헌종 6)에는 구암산 소림굴에서 청류암으로 거처를 옮겨 참선에 몰두하며, 『법보단경요해(法寶壇經要解)』(1845), 『태고암가입과(太古庵歌入科)』(1850)를 저술하였다. 1852년(철종 3) 4월 24일, 구암사 화장대에서 일기를 마쳤다. 세수는 86세, 법랍은 68년이다.
이후에 백파의 제자 백암 도원(白岩道圓)과 손제자 설두 유형(雪竇有炯) 등이 추사 김정희에게 비문을 청하였고, 입적 후 4년이 되는 1856년(철종 7) 추사는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대율사(白坡大律師)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라 하는 비문과 대기대용의 선풍과 율사의 이름을 지은 내력을 설명한 음기(陰記)를 썼다. 비는 2년 뒤인 1858년(철종 9) 고창 선운사에 세워졌다.
백파는 화엄 교학, 간화 참선, 정토염불을 함께 닦던 조선 후기 불교계의 전통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대학자로 평가받는다. 설파 상언과 호암 체정(虎巖體淨)의 법을 이었으며, 백파의 제자로는 구봉(龜峰), 도봉(道峰), 정관(定觀), 백암(白岩), 영산(影山), 혜암(慧庵)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도봉 국찬(道峰國粲)의 문하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설유 처명(雪乳處明), 영호 정호(映湖鼎鎬)로 이어지는 선암사 문도와, 혜암 보혜(慧庵普惠)의 문하인 월초 거연(月初巨淵), 운허 용하(耘虛龍夏)로 이어지는 봉선사 문도가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 집필자 : 김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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