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무염 |
|---|---|
| 한자 | 無染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사산비명, 선문구산, 성주산문 |
| 시대 | 통일신라 |
| 출생 | 800년(애장왕 1) |
| 입적 | 888년(진성여왕 2) |
| 호 | 무량(無量), 무주(無住) |
| 시호 | 낭혜화상(朗慧和尙), 백월보광(白月葆光)(탑호) |
| 탑소재지 | 회암사 |
| 비소재지 | 회암사 |
통일신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
통일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이다.
무열왕(武烈王)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13세인 813년(헌덕왕 5)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 선사의 제자가 되어 능가선(楞伽禪)을 수년 동안 배웠고,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 나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스승인 법성이 권하여 821년(헌덕왕 13)경 중국으로 가는 사신 김양(金陽)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갔다. 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다시 『화엄경』을 익혔으나,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그곳 마곡사(麻谷寺)의 보철(寶徹) 선사에게 선을 물어 인가를 받았다. 보철 화상이 입적하자 사방의 고적과 큰스님을 찾아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병자를 구호하고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을 구휼하였다.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고 불렀다.
845년(문성왕 7)에 당나라에서 일어난 ‘회창(會昌)의 법난(法難)’을 피해 귀국하였다. 김흔(金昕)의 초청으로 웅천주(熊川州)의 오합사(烏合寺)에 주석하였는데, 배우려는 이들이 모여들어 선도(禪道)가 크게 일어났다. 이에 문성왕(文聖王)은 그 절을 성주사(聖住寺)라 개칭하고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후의 헌강왕 역시 대사를 국사로 받들고 예우를 다하였다. 888년(진성여왕 2) 11월 17일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입적하였다. 법랍 65년. 입적 후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호를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문하에 2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승량(僧亮), 보신(普愼), 순예(詢乂), 심광(心光) 등이 선풍을 계승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입적 후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이 보령 성주사 터에 세워졌다. 이 비문은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이며, 비는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 집필자 : 김종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