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김정희 |
|---|---|
| 한자 | 金正喜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초의 의순, 백파 긍선, 삼종선론, 봉은사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86년 |
| 입적 | 1856년 |
| 호 |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
| 탑 소재지 | 신륵사(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
| 비 소재지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회암사(선각왕사비)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선 논쟁에 참여한 인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실학자, 서화가로서, 초의(艸衣)와 함께 백파 긍선(白坡亘璇)과의 선 논쟁에 참여했으며, 만년에는 과천에 머물며 서울 경기 지역의 불서 간행에도 영향을 주었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후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와 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1830년 부친이 윤상도(尹商度)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불운한 일생을 지냈지만, 글씨와 그림에 천재적 자질을 지녀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였고, 봉은사에 머물며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남호 영기(南湖永奇)가 『화엄경』을 판각하여 장경각에 봉안하였는데, 그때 쓴 추사의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이 현재도 걸려 있다.
평생 여러 고승과 교유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특히 초의 의순(草衣意恂) 선사와 선론(禪論)을 나누었는데, 초의와 함께 백파 긍선의 삼종선론(三種禪論)을 반대한 일은 유명하다. 그들은 종래 화두 일변도의 선문(禪門)을 질타하고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선교불이(禪敎不二)를 논할 뿐만 아니라 선의 모든 종파가 ‘일체일미(一切一味)’임을 주장하였다.
추사의 문집(『완당전집』)에는 추사가 백파에게 보낸 편지글 세 편이 실려 있고, 금명 보정(錦溟寶鼎)이 펴낸 『백열록(栢悅錄)』에는 「김추사선생증백파서(金秋史先生證白坡書)」가 실려 있어 논쟁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50년대에는 서울과 한강 이북의 사찰에서 불경을 판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 집필자 : 김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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